'고려 처녀 공출' 상소문 한 장이 중단시켰다

입력 2014-05-10 08:00:00

교서·묘지명·수필 등 명문장 뽑아 현대식으로 재미있게 번역·해설

고려를 읽다/이혜순 지음/섬섬 펴냄

우리는 조선에 비해 고려를 잘 모른다. 삶과 역사의 고비마다 고려 사람들은 무엇을 열망하고 고뇌했을까. '고려를 읽다'는 고려시대에 여러 사람이 쓴 여러 글 중에 명문장을 뽑아 현대식으로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것이다.

국왕의 정치공문부터 목숨을 걸고 임금을 비판한 신하의 상소문, 영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보낸 외교편지, 사대부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글 등을 통해 고려 500년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책은 총 6장으로, 1장에서는 왕과 신하, 그들의 세계, 2장에서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킨 명문장, 3장에서는 임춘, 이규보, 이숭인, 이색 등의 글을 통해서 보는 당시의 '친구', 4장에서는 아내의 묘지명을 쓴 최윤의와 박전지의 글과, 술과 돈을 인생에 비유한 임춘의 글을 통해 본 '사람의 일생', 5장에서는 '사대부의 삶과 철학, 사회와 역사인식', 6장에서는 김부식과 김수자, 김인존의 글을 통해 고려인의 '종교와 학문의 세계' 등을 다루고 있다.

고려를 침략해 끝내 항복을 받아낸 원나라는 고려의 처녀를 공출로 잡아갔다. 이때 원나라에서 유학하고 거기서 급제한 이곡은 원나라 조정에 '처녀 공출 폐지를 요구하는 글'을 올렸다.

'오늘날 황제의 명령이라고 사칭해서 동녀를 빼앗아 수레에 싣고 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저 남의 딸을 빼앗아 윗사람에게 아첨하고 자기의 이익으로 삼는 것은, 이 일이 비록 고려가 자초한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어찌 원나라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중략)

삼가 바라옵건대 덕음을 반포하시어, 감히 내지라고 사칭하며 위로 황제의 들으심을 더럽히고, 아래로 자기의 이익을 꾀하여 동녀를 취하는 자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첩을 취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법령으로 분명하게 금하시어, 앞으로는 그들이 기대하는 마음을 아예 끊어버리게 하소서.'

이 같은 노력 끝에 원나라 순제 지원 3년(1337년), 고려 충숙왕 복위 6년에 동녀공출을 폐하라는 황제의 명이 내려졌다.

그런가 하면 고려 의종과 고종 때 문인이었던 이규보의 '사가재기'(四可齋記)는 그의 인생철학을 잘 보여준다.

'밭이 있어 갈아서 먹을 수 있고, 뽕나무가 있어 누에 쳐서 옷을 해 입을 수 있으며, 샘이 있어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있어 땔 나무를 장만할 수 있으니, 내 뜻에 맞는(可) 것이 네 가지가 있으므로 그 집을 '사가'(四可)라 이름 지었다.(중략) 내가 이 집에 살면서 전원의 즐거움을 얻는다면, 복잡한 세상살이를 침을 뱉듯 내버려 돌아보지 아니하고, 태평시대의 늙은 농부가 되어, 흙덩이를 치고, 배를 두드리며 성인의 교화를 노래하고, 읊어서 피리 불고 거문고를 뜯는 것이 어찌 불가할 것인가.'

또 여러 문신들의 글은 고려와 주변국의 복잡한 정세를 짐작하게 해주는가 하면, 임금과 신하 간에 주고받은 교서와 상소문은 당시 고려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던 사안을 알게 해준다. 고려사회와 문화, 풍속을 알 수 있는 단서도 곳곳에 있다.

이 책에는 곳곳에 재미난 이야기가 있으나, 워낙 쉽게 풀어서 나오는 근래의 책들에 비하면 다소 딱딱하다. 지은이 이혜순은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511쪽, 2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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