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정조의 암살을 둘러싼 운명의 24시 '역린'

입력 2014-05-01 08:00:00

엇갈린 운명을 가진자들의 진실

역린
역린

단 하루 동안 벌어진 역사적 사건인 정유역변을 재구성한 스토리, 현빈의 영화 복귀작, 충무로 최고의 호화 멀티캐스팅, 드라마 '다모' 연출자 이재규 감독의 영화 진출작,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왕 정조가 주인공, 제작비 100억 원의 거대 예산. 이 갖가지 요소들이 합쳐져 영화는 화제작일 수밖에 없다. 웬만해선 실패하기 힘든 프로젝트다. 강렬한 힘을 가진 제목까지 더해져 2014년 상반기 한국영화 최고의 기대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1777년 7월 28일, 정조 1년. 끊임없는 암살에 시달리는 정조(현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조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 상책(정재영)은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킨다. 다음 날 새벽 정조는 금위병 대장 홍국영(박성웅)을 대동하고 어린 할머니인 정순왕후(한지민)에게 문안인사를 하고, 그녀는 정조에게 은밀하게 경고한다. 정조의 처소에는 나인 월혜(정은채)가 의복을 수거하기 위해 다녀가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가 찾아와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하며 아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한편 궐 밖에서는 조선 최고의 실력을 지닌 살수(조정석)가 왕의 목을 따오라는 광백(조재현)의 암살 의뢰를 받는다.

'역린'은 최근 흥행작의 몇 가지 장르 공식들을 따른다.

첫째, 역사상 드라마화가 많이 되었던 왕을 재해석할 것. 애정을 갈구하는 나약한 연산군을 그린 '왕의 남자'(2005), 실리 외교를 추구하다가 축출되어버린 슬픈 왕 광해군을 그린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세조가 된 흉포한 수양대군을 그린 '관상'(2013)의 성공의 뒤를 이어, '역린'은 개혁 군주 정조의 냉철함 아래 정을 그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둘째, 멀티캐스팅으로 다양한 작은 이야기들을 엮는다. '도둑들'(2012), '관상'(2013)처럼 올스타 캐스팅은 화려한 스케일을 과시하며,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 구조에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펼치는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잘 살려낼 수 있다.

셋째, 궁중 사극에 서민의 이야기를 넣을 것. '왕의 남자'의 남사당패,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임시 왕 노릇을 하는 광대, '관상'의 칩거하는 천재 관상가 이야기는 공식화된 역사를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끌어낸다. '역린'에는 살인을 위해 길러진 살수와 나인의 이야기로 궁중 역사극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아쉽게도 '역린'에서 위의 모든 공식들은 잘 다듬어지지 않는다. 단 24시간을 다룬다는 영화의 시간 구조, 궁중 안에서 펼쳐지는 스타일리시 액션극이라는 시도,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다채로운 인물 군상 등의 요소들로 영화는 충분한 기대 요소들을 갖추었다.

새로운 캐릭터가 아닌 정조를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을 상상력을 가지고 풍성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현빈의 잘 단련된 근육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조가 두뇌뿐 아니라 무에도 능한 왕임을 보여주려 했지만 설득력이 없으며, 한 스타 개인의 몸을 보여주는 눈요기 이상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멀티캐스팅을 통한 다채로운 서브플롯들은 서로 잘 조합되지 않아 메인플롯의 진행을 오히려 방해하고 만다. 궁중에서의 암투, 왕과 신하, 살수와 나인의 엇갈리는 인연들을 비장하게 펼치고서 우연적 요소들을 가져와 허망하게 해결을 보는 방식이 반복된다.

서민들의 이야기는 눈물 빼는 신파다. 시대에 도무지 맞지 않는 사고방식과 습관은 정신없이 펼쳐진 이야기를 수습하기 위한 손쉬운 방편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적 배경이 분명함에도 퓨전으로 지어진 의상과 건축은 화려한 스타일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교차편집으로 각자를 보여주다 막판에 팽팽하게 대립해야 하는 정조 캐릭터와 살수 캐릭터는 밋밋하고, 정순왕후, 혜경궁 홍씨, 나인 월혜 등 여성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의 개성적 영역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조 캐릭터를 보조하기 위해 소비된다. 전체적으로 인물들의 연기 앙상블이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못한다.

공간, 의상, 분장, 액션장면 연출에 공을 들인 티가 분명하게 나고, 이에 대한 괄목할만한 성취는 박수를 쳐줄만 하다. 하지만 영화가 빈약한 스토리로 스펙터클만 가지고는 성공할 수 없음을 이 영화가 또 한 번 입증한다.

사극은 동시대 관객의 소망을 알레고리적으로 충족시키는 영역이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기원하는 바를 역사 공간의 어떤 인물을 통해 대리 만족함으로써 다시금 살아갈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거대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무능한 권력집단에 대한 분노로 헤매고 있는 우리 앞에, 우리도 한때 좋은 군주를 가진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위안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정조라는 슬기로웠던 군주가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시대를 열어갔던 그 승리의 역사를 목도함으로써 작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이번 영화는 그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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