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웃프다

입력 2014-04-28 08:00:00

세상이 변함에 따라 말도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기도 하고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최근 사람들이 많이 쓰면서 공감을 얻고 있는 말 중에 하나가 '웃프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웃기다'와 '슬프다'가 결합한 말로 분명히 슬픈 상황인데 웃음이 나는 상황이나 실컷 웃고 났지만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는 슬픈 느낌이 드는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웃기다'와 '슬프다'는 것은 모순된 감정이어서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대학 시절 김대행 교수님은 이런 상황이 바로 한국 문학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말씀하시며 '웃음으로 눈물 닦기'라는 용어를 제안하셨다. 고등학교에서 한국문학의 특징을 '한(恨)의 정서'라고 배웠던 입장에서는 조금은 생소했지만 판소리에 대해 배우면서 그 말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판소리에서 '웃음으로 눈물 닦기' 혹은 '웃픈'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흥보가 매품을 팔기 위해 병영에 간 대목이다. 먹고살기가 힘들어 남 대신 매를 맞고 돈을 벌려고 하는 것도 슬픈 일이지만 병영에 가 보니 매품을 팔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가득했다는 현실은 더욱 슬픈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모여든 가난뱅이들이 서로 자기가 매품을 팔겠다고 가난 자랑을 시작한다. 흥부는 자기를 '조선 제일의 가난뱅이'로 소개하지만, 이십오대째 가난뱅이로 살아왔다는 솔봉애비나 사십육대째 호적도 없이 남의 집 곁방살이로 살아왔다는 김딱직과 같은 사람들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신세가 된다. 누가누가 더 가난한가 이야기를 하면서 집에 누우면 상투가 울 밖으로 나가고 마누라 알궁둥이가 담 밖으로 나간다는 이야기나 부엌의 쥐가 밥알 주우려고 돌아다니다가 가래톳이 서서 드러누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히 슬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장된 표현에 웃음이 난다.

우리 문학 작품들을 보면 분명히 '한'을 이야기하는 것들이 많기는 하다. 이에 대해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그로 인한 불안과 위축의 역사가 하루도 마음이 편할 수 없는 우울의 정서를 만들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기득권층에 대한 가난한 민중들의 울분이 한이 되고, 남존여비의 체제 속에서 여자들의 억눌린 욕구가 한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 맞을 수도 있지만 슬픔을 슬픔으로 이야기함으로써 푸는 것은 우리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판소리나 수다스러운 시집살이 노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슬픔을 웃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웃음으로 눈물을 닦고 한을 풀 수 있다는 것, 웃프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은 고달프지만 그래도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우리 민족의 긍정적인 정신과 낙천적인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인고 교사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