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이후 애국지사들은 대거 중국 상해로 대일 항쟁의 무대를 옮겼다. 당시 상해는 세계 각국의 조계지가 있어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한성임시정부, 노령임시정부와 더불어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4월 11일 프랑스조계에서 13도 대표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이 국호를 제안한 사람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한 신석우였다. 왕조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헌법 제1조에 민주공화국임도 선포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에 매헌 윤봉길은 겨레로부터 위임받은 임무를 완수하여 일제의 간담을 떨리게 하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지만 반면에 거사를 주도했다고 발표한 백범에게는 60만원(현재 환산가치 300억원)이란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일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피신 연락을 받지 못한 안창호, 이원훈, 홍남표 등이 구속되고 13년 동안 기반을 다진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상해와 가까운 항주(杭州) '군영반점'을 망명정부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백범은 중국 국민당 간부 저보성의 도움으로 항주와 인근한 가흥(嘉興) 매만가(梅灣街)에 은신하면서 남호(南湖)에 탈출용 배를 항상 띄워놓고 의정원 선상회의를 주도하고 은신처 바깥에 널린 빨래의 색깔에 따라 피신을 하는 등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가면서 항주 임시정부를 유지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몇 달 만에 남경을 점령한 일제는 30만 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했으며 패전한 국민당 정부는 내륙 깊숙한 중경(重京)으로 천도함에 따라 더부살이를 하던 임시정부도 중국국민당 정부가 마련해준 목선을 타고 양자강을 거슬러 100여 명의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이동을 하게 되었다.
장사(長沙)를 거쳐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그리고 불산(佛山), 유주(柳州)를 거쳐 상해에서 출발한 지 8년 만에 떠돌이 신세를 면하고 중경(重京)에서의 5년간 정착시대로 접어들었다. 상해임시정부로 시작된 대한민국은 중경임시정부에서 그 막을 내렸다. 1945년 11월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때 백범은 어느덧 70세 노인이 되어 버렸다.
고난의 대이동 시기에 임시정부의 중요 인사들은 이국땅에서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그리고 백범의 부인인 최준례는 이국땅 상해 만국공묘에 묻혔으나 1993년 국내로 유골이 봉환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이동녕 또한 사천성(四川省)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쳤다.
27년간 험난한 고비를 넘기며 중국 대륙 수만 리를 헤매며 독립을 위하여 신명을 바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의 지난했던 생활들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해방된 조국으로 함께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선열들의 최종의 목표였기에 확고한 신념과 불굴의 의지로 임시정부를 유지했으며 그때 만든 법안들과 강령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동귀'(與子同歸).
'조국이 독립되면 우리 모두 함께 돌아가자.'
여의도 광복회관 중앙홀에 걸려 있는 상해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이었던 홍진 선생의 글을 볼 때마다 순국선열들과 애국 영령들에 대한 한없는 경외감과 함께 슬픔을 느낀다. 다시는 외세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치욕의 역사는 이 땅에 없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된다.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한 독립유공자들 덕분에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타국에서 고난한 삶을 살았던 임시정부 역사는 근대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기에 비록 지났지만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은 온 국민이 기억하여야 할 국가기념일인 것이다.
오상균/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댓글 많은 뉴스
"尹 지지율 46% 나와…2030 지지율도 40%대 ↑"
박수현 "카톡 검열이 국민 겁박? 음주단속은 일상생활 검열인가"
'카톡 검열' 논란 일파만파…학자들도 일제히 질타
이재명 "가짜뉴스 유포하다 문제 제기하니 반격…민주주의의 적"
"나훈아 78세, 비열한 노인"…문화평론가 김갑수, 작심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