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소련의 영공은 미국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1956년 7월부터 4년간 미국의 고고도 정찰기 U-2기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등 주요도시와 군사기지 상공에서 유유히 사진을 찍어댔다. 소련은 분했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레이더로는 미국의 이런 '침실 훔쳐보기'를 탐지할 수 있었지만 소련 전투기의 최대 비행고도와 대공 미사일의 사정거리 모두 U-2기의 비행고도에 못 미쳤던 것이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는 이를 갈며 모욕을 되갚아줄 때를 기다렸다. 1959년 마침내 신형 대공 미사일이 개발되자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다시 한 번만 더 낯짝을 내밀어봐라." 1960년 5월 마침내 그의 소원은 이뤄졌다. 다시 '낯짝을 내민' U-2를 격추하고 조종사 프란시스 게리 파워즈를 체포해 간첩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의기양양해진 흐루쇼프는 2주 후 파리에서 열린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깨버렸다.
이후 소련은 자신의 방공망이 절대 뚫리지 않는 철옹성이라고 큰소리쳐왔다. 그러나 허풍이었다. 1983년 소련 전투기의 KAL 007기 격추는 이를 잘 보여줬다. 소련 방공망은 절대 뚫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은 실제로는 절대 뚫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 방공망을 진짜 웃음거리로 만든 사건은 1987년 5월 28일 19세 서독청년 마티아스 루스트의 모스크바 '침공'이었다.
루스트는 세스나 경비행기로 핀란드의 헬싱키를 출발,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그 많은 레이더와 요격 전투기, 지대공 미사일이 조그만 프로펠러 비행기 앞에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루스트는 그 '죗값'으로 14개월 징역형을 살았지만 소련이 치른 대가는 그와 비교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군부 핵심의 몰락을 가져왔고 최종적으로는 소련 붕괴로 이어졌다.
북한 무인기가 청와대 영공을 뚫은 사실은 우리에게 루스트의 모스크바 착륙이나 마찬가지다. 해마다 30조 원 이상의 국방비를 쓰고 있지만 국방시스템은 그 값을 전혀 못한다는 의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대통령은 '통일 대박'을 얘기했지만 지금과 같은 '국방 쪽박'으로는 언감생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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