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 4. 16, 1983. 4. 14, 1984. 4. 17, 1985. 4. 13, 1986. 4. 11, 1987. 4. 8,(중략) 1995. 4. 8.
무슨 암호 같은 이 숫자는 '도청 공보 계장 엄지호는 이 시대의 희귀 식물이다. 음지에서 자라는 이름 모를 민초를 빼닮았다'로 시작하는 최석하의 '희귀 식물 엄지호'라는 시의 제일 마지막 구절이다. 대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엄지호라는 사람이 작가의 상상 속의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지만 엄지호는 그 당시 경북도청 공무원이었다.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웃의 여러 가지 힘든 일을 앞장서서 해결해 주기도 하고 불쌍한 아이들을 거두어서 공부도 시켜 주고 결혼까지 시켜 준 분으로 알고 있다.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한 그의 가계가 결코 풍족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우리에게 보통사람이 가꾸어가는 행복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준 우리 시대의 진정한 희귀 식물이 아닌가 싶다.
마른버짐 같은 그의 수첩에 1982년부터 1995년까지 14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적어 놓았다는 그 숫자는 무엇일까? 벚꽃 만개일이다. 부와 명예를 가지고 군림하는 권력자들에게는 하찮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꽃이 피는 날을 꼬박꼬박 적어 가슴에 품고 다니는 희귀한 행복을 그들은 모르리라. 꽃이 피었다는 눈부신 사실 앞에 누군가가 곤경에 빠졌다는 절박한 사실 앞에서 무심히 고개 돌리지 않는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꽃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며, 삶의 깊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다시 봄이 온다. 아직도 어수선한 바람이 불고 있는 황량한 하늘을 뚫고 봄은 단호한 맹세처럼 무채색의 세상을 물들여 갈 것이다. 무거운 짐을 메고 걷는 당신의 어깨 위에도, 시린 생계를 거두는 노모의 야윈 손끝에도, 소쩍새 혼자 놀다 가는 쓸쓸한 무덤가에도 봄은 온다.
매서운 겨울의 찬바람 속에 잠잠히 숨어 있던 신비한 생명들이 조심조심 세상을 향해 몸을 내밀며 우리를 향해 조용히 웃고 있다. 잔설을 헤치며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노란 복수초, 청순한 소녀처럼 해맑은 얼레지, 어린아이 입술같이 작고 귀여운 노루귀, 이 밖에도 봄의 전령을 자처하는 현호색과 깽깽이풀이 이미 봄의 언저리에 눈부시게 피어 있다. 그러나 이 신령한 야생의 풀꽃들은 무릎을 낮추고 고개를 숙여야만 볼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겸손의 선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무한한 우주 속에 떠있는 하나의 작은 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폴로 14호를 타고 달에 내렸던 우주인 '애드가 미첼'은 지구는 우주 속에 떠있는 하나의 작은 반점처럼 보였지만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었다고 했다.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작고도 작은 별인 우리의 지구는 왜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을까? 그것은 그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가진 수없는 목숨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햇살을 모아 꽃을 피우며, 꽃이 진 자리에 다시 열매를 맺게 하는 경이로운 생명의 섭리가 있고, 날마다 씻어내도 다시 고이는 어쩔 수 없는 욕심과 탐욕이 있는 곳이며, 불빛을 거느리고 강이 흘러도 수심이 보이지 않는 강물처럼 침몰하는 우울과 슬픔이 있는 곳이다.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고통의 긴 시간들도 있지만 고통 위에 손을 얹고 오래오래 기도하는 믿음과 사랑도 있는 곳, 우리는 우주의 가장 아픈 별에 산다.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꽃잎을 누가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저녁 하늘을 물들이는 눈부신 노을빛을 누가 품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 피어 있는 꽃 앞에 서 있어도 내일 불어올 바람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빈한(貧寒)한 우리들의 삶, 하루 평균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나라,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통계 자료는 너무나 가슴 아프다. 숱한 젊은이들이 성적의 압박과 미래에 대한 절망을 안고 죽어가고 있는 나라, 세계의 언론들은 우리나라를 자살공화국으로 비난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마저 들린다.
상처이면서 당신은 사랑이며, 연민의 손길이 스쳐 가는 자국마다 우리는 단지 흔적으로도 남지 못하는 순간을 살다 간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이제 황량했던 들판에도 거친 산비탈 메마른 계곡에도 짧은 봄은 다시 온다.
황영숙/시인·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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