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거인에게 길을 묻다] 제2부 호암 이병철 4)장인의 리더십…장인이 되어야 최고가 된다

입력 2014-03-24 07:54:54

제일모직 품질 경영·무결점 운동…'초일류 삼성' 디딤돌 놓다

호암이 감명받았던 모리타이용점의 호암 전용 면도기. 1950년 이 이발소와 인연을 맺은 호암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 이발소를 찾았다. 매일신문 DB
호암이 감명받았던 모리타이용점의 호암 전용 면도기. 1950년 이 이발소와 인연을 맺은 호암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 이발소를 찾았다. 매일신문 DB
1878년 개업한 일본 도쿄 모리타이용점. 호암은 1950년 2월, 이곳에 우연히 들렀다가 대대로 가업을 이어가는 일본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에 놀랐다. 호암은 이날 경험을 바탕으로
1878년 개업한 일본 도쿄 모리타이용점. 호암은 1950년 2월, 이곳에 우연히 들렀다가 대대로 가업을 이어가는 일본인들의 투철한 직업의식에 놀랐다. 호암은 이날 경험을 바탕으로 '장인 정신'을 경영 현장에 접목시키려 애썼다. 매일신문 DB

1964년 어느 날. 도쿄시내 유명 복요리집인 '후구겐 식당'. 호암은 우시바 노부히코 일본 외무심의관과 김동조(훗날 외무장관 역임) 주일대사, 김봉은(훗날 상업은행장 역임) 한국은행 동경지점장과 함께 이곳에 들렀다.

호암 일행은 예약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일본 정부의 '높은 분'을 모시고 갔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인 주인은 식당문을 들어서는 일행 모두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일본 외무심의관은 물론 일행 모두가 주인의 거친 태도에 당황했다.

"제가 복요릿집을 하는 것은 돈을 벌자는 것 외에 손님들에게 최고의 맛을 서비스하자는 데 있습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제 맛이 안 나는 것이 억울합니다. 네 분 모두 보통 손님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규슈 출신으로 일본 제일의 복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그는 정성들여 만든 자신의 요리가 식어버려 맛을 잃게 된 것이 안타까워 화를 냈다고 사과했다. 180㎝를 훨씬 넘는 거구인 그는 큰 손을 바삐 움직이며 음식을 다시 만들어 내왔다. 맛을 잃어버린 음식을 식탁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직업에 이토록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평생을 파고드는 직업의식, 그것은 정말 내게 감동적인 기억이었다."(호암자전 중에서) 후구겐 식당의 주인처럼, 호암 역시 기업 경영의 현장에서 '장인 정신'을 한시라도 놓치지 않은 기업가였다.

◆장인 정신을 가져라

1950년 2월 사업 구상을 위해 일본 도쿄에 들렀던 호암은 어느 날 저녁, 가로등도 없는 뒷길을 걷다가 길가 이발소에 들어갔다. 허술한 가게 입구에는 '모리타'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가위질을 하고 있는 40세 전후로 보이는 주인에게 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건넸다.

"이발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소?"

"제가 3대째니까, 가업이 된 지 이럭저럭 60년쯤 되나 봅니다. 자식놈이 계속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특별한 뜻이 없는 잡담이었지만 예사말로 들리지 않았다. 패전으로 완전히 좌절하고 있어야 할 일본인인데, 담담하게 대를 이어 외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투철한 직업의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호암자전 중에서)

모리타 이용점은 1878년 개업했다. 모리타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2차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 세례를 받아 패전 후 뼈대만 남은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은 1878년 창업했다. 도쿄의 유명한 과자점인 도라야는 1592년 개업, 400여 년 이상 과자 만드는 한길을 걸어왔다. 마쓰이라는 건설회사도 마찬가지. 1586년 창업한 이 회사는 400여 년을 건설업에 몰두했다. 오사카의 과자점 스루가야는 1461년 창업했다.

호암은 '장인 정신'과 유사한 일본의 '직인(職人) 정신'을 평생의 사업 신념 중 하나로 삼았다.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고 그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려는 일본인들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호암은 이러한 장인 정신이 패전국 일본을 다시 일으켜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비결이라고 믿었고, 이를 자신의 경영 현장에 접목시켰다.

◆장인은 노력에서 나온다

"내가 일본의 나쓰라는 곳에 피서를 갔을 때 주위를 지나다가 우연히 양돈장이라고 쓰여 있는 곳이 있어서 들어가 보니 30대 청년이 혼자 일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물어보았더니 6천 두의 돼지를 키우고 있는데 일하는 사람은 4명뿐이라고 했다. 그 청년은 명문 도쿄대 출신으로 월급 15만엔을 받고 스물다섯 살 때부터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무슨 일을 하느냐고 했더니 본인이 직접 분뇨를 치우고 청소도 하고 일용직들을 다스린다고 했다. 해가 뜨면 현장에 나가고 해가 지면 사무실로 들어와 일 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일본인들의 정신을 배워야겠다."(1985년 용인자연농원 방문 때 직원들에게)

호암은 삼성 본관 신축 때 대리석 타일의 색상에서부터 기둥과 기둥의 간격 등에 이르기까지 무려 150개 항목에 관한 지침을 내렸다. 신라호텔을 지을 때도 우동집 주방장을 자신의 일본 단골 우동집에 보내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신라호텔 내 일식당인 아리아케에는 노인들이 신발을 신을 때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벽에 손잡이를 달라고 지시하고, 구둣주걱도 지팡이만큼 긴 것을 비치하라고 했다. 제일모직에서 와이셔츠를 생산할 때는 호암 자신이 직접 전 세계 명품 와이셔츠 150종을 매일 한 벌씩 입어보고 그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내려 보내 생산하라고 했다.

호암은 평소 프랑스제 워터맨 만년필을 즐겨 사용했는데, 워터맨의 경우도 펜촉을 20개씩 별도로 사서 가장 우수한 펜촉에 대해 연구해보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호암은 직원들에게 "같은 금형에서 수십만 개가 찍혀 나와 다 같아 보이는 만년필이지만 이 가운데서도 특히 2, 3%만이 최고의 품질을 갖고 있다. 이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최고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장인이 되어야 최고가 된다

호암이 삼성의 창업지 대구에 만든 제일모직. 1954년 창업한 제일모직 대구공장은 '품질 경영'이라는 글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부터 품질 관리에 노력했다. 제일모직은 1961년부터 각 생산팀별로 시험검사와 연구활동을 계속하면서 품질관리를 추진, 1965년 국내 최초로 국제양모사무국으로부터 울마크(Wool Mark) 사용허가를 받았다.

1968년에 이르자 제일모직은 무결점 운동을 시작했다. 1975년 10월 제1회 전국품질관리대회에서 제일모직은 대상을 수상했다.

이 운동은 삼성의 모든 관련사로 퍼져 나가 삼성이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일조했다.

호암은 장인 정신을 '완전주의'로 발전시켜 나갔다.

호암은 완전주의와 관련, 전사적 품질관리를 강조했다. 품질이라고 하면 흔히 제품의 품질에만 한정하기 쉽지만, 서비스의 질, 기업경영의 질까지 넓은 의미에서 품질이라고 호암은 생각했다.

호암은 아랫사람에게만 완전주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기업인으로서 경영을 잘못해 부실기업을 만드는 것은 범죄와 다름없다며 호암은 스스로 완전주의를 실천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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