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보헤미안' '테라 로사'

입력 2014-03-13 14:10:18

열 살 때 미군들이 던져주던 커피, 박바가지 돌려가며 마셨는데…

나의 커피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커피를 마셔 봤으니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것도 블랙커피를 마셨으니 말이다. 6'25전쟁이 터지자 미군 전차부대가 고향마을 입구 공설운동장에 진을 쳤다. 내 또래 아이들은 철조망 밖 '움턱굴'(물기 없는 작은 구덩이) 속에 모여 놀다가 미군들이 지나가면 "헤이 추잉검 기브 미"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은 사탕을 던져주거나 먹다 남은 깡통을 주고 가곤 했다.

더러 레이션 박스 속에는 껌과 성냥도 있었으며 이상하게 쓴맛 나는 검은 가루 봉지도 들어 있었다. 미군들이 주는 것은 모두가 엄청 맛있었다. 그러나 검은 가루만은 맛도 없고 쓰기만 하여 아무도 먹지 않았다. 어느 하루는 부대를 따라 들어온 양공주의 남동생인 우리 또래가 "왜 이걸 버리냐, 이건 커피라는 건데 물 붓고 설탕만 넣으면 콜라보다 더 맛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설탕이 어데 있노"라고 불평하자 "그건 내가 갖고 올게"라며 집으로 뛰어갔다.

우리는 이병놀이가 끝나면 무슨 의식을 치르듯 그 아이가 제조해준 커피를 마시곤 했다. 박바가지에 떠온 찬물에 설탕을 넣을 때도 있고 안 넣을 때도 있는 검은 물을 돌려가며 마셨다. 차라리 맹물을 마시는 게 낫지 아무 맛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의식은 부대와 함께 '히데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그 아이가 누나와 함께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순서대로 돌아오는 바가지 커피를 먹지 않고 밉보였다간 껌이나 사탕을 제대로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나의 커피 역사는 이렇게 초라하고 치사하다. 부대가 떠나고 난 뒤 커피는 물론 먹다 남은 콜라와 고기 깡통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의 농촌은 개떡조차 귀한 시절이었으니 맛없는 검은 물도 문득문득 생각났다. 떠나버린 그 아이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커피와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외근 기자의 하는 일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만나면 '커피 한 잔'이고 퇴근하면 '술 한 잔'이었다. 어쭙잖은 그 문화에 젖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하루 몇 잔을 마셨는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요즘은 내가 직접 내린 드립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때운다. 젊은 시절에는 멋모르고 아무거나 마셨지만 이젠 철이 들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향과 맛의 커피를 선택하여 마신다. 자판기 커피와 종이컵도 싫어한다. 산행할 때는 두바이로 가는 E-380 항공기에서 슬쩍해온 가볍고 예쁜 찻잔으로 커피를 마신다. 코펠 속 알루미늄 잔으로 마시는 것보다 열 배쯤 멋이 있다. 살짝 지나가는 선들바람이 커피 향을 맡았는지 '제법이네'하고 한마디 거든다.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멋 부림이 나는 좋다.

이번 겨울 여행의 행선지를 강릉과 주문진 방면으로 잡고 보니 욕심 하나가 생겼다. 겨울철 복어와 막국수도 먹어야겠지만 유명한 강릉 커피를 맛보는 것도 빠뜨릴 수 없었다. 출발하기 전 인터넷을 뒤져보니 '보헤미안'과 '테라 로사'는 꼭 들러봐야 할 커피 명소였다. 그리고 안목항 커피 거리와 '산토리니 카페'도 여건이 허락한다면 기웃거려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계획은 계획일 뿐 실천이 따라 주지는 못했다. 하루에 다섯 끼쯤 먹는다면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막국수 먹기는 단 한 번, 커피도 한 곳만 들르기로 했다. 보헤미안은 가게 이름부터 마음에 들어 그곳에 들르기로 했다. 나도 한때는 떠돌이처럼 돌아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보헤미안이란 이름이 무턱대고 좋았다.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 181(033-662-5365) 연곡점을 입력시키고 출발했는데 잠깐 사이에 길을 놓치고 말았다. 우린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커피숍을 공장식으로 운영한다는 테라 로사 본점(033-646-2760'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973-1)으로 가기로 했다.

이곳은 시골 들판의 마을 옆에 붙어 있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오전 10시쯤인데 주차장도, 실내도 와글와글이다. 커피 기구와 커피 향으로 장식되어 있는 실내 공간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우린 커피 어린나무를 키우는 비닐하우스 같은 곳으로 밀려났다. 열 살 때부터 블랙커피를 마신 마니아를 이렇게 대접하다니.

나는 메뉴판을 들고 한참 동안 끙끙거렸다. 값비싼 게 좋을 것 같아 과테말라 산 구아야바라는 8천500원짜리를 주문했다. 아뿔싸, 이 돈이면 라면 안주에 막걸리가 몇 통인데, 허 그것 참.

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