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쫙∼대구 역사유물] <9>동천동 청동기 취락 유적

입력 2014-03-01 07:01:45

청동기 마을유적 세상 밖으로…타임머신 타고 고대로 날라간 듯

1997년 발굴 당시 동천동 마을 유적지 전경. 전체 발굴 면적은 약 4만5천㎡로 청동기시대 당시 250~3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남문화재연구원 제공
1997년 발굴 당시 동천동 마을 유적지 전경. 전체 발굴 면적은 약 4만5천㎡로 청동기시대 당시 250~3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남문화재연구원 제공
집터 유적지 발굴 모습
집터 유적지 발굴 모습

온 마을 사람들이 피난이라도 갔단 말인가?

1975년 진주 남강 유적을 발굴하던 조사원들은 깜짝 놀랐다. 토층을 걷어내자 조금씩 자취를 드러내는 마을 유적, 마치 얼마 전 고대인들이 거주 했던 것처럼 현장이 잘 보관돼 있었다. 길게 늘어선 이랑은 지금이라도 수수가 싹을 틔울 듯 촉촉하고 밭엔 방금 지나간 듯한 선사인들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들어났다. 진주 대평면 청동기 취락 유적이 발굴되면서 베일에 가려졌던 청동기 시대 마을의 전모가 밝혀졌다.

선사 마을 유적으로 치자면 대구도 빠지지 않는다. 1997년에 발굴된 북구 동천동 유적은 청동기 취락 연구 논문 각주(脚注)나 주석으로 단골로 등장하는 유적이다.

60여 가구가 부락을 이룬 마을에는 망루, 누각격인 고상가옥(高上家屋)이 수십 기나 나왔고 선사시대 요새 흔적인 환호(環濠) 유적이 대규모로 발견됐다. 지금이라도 물길을 흘려보낼 것 같은 도랑 흔적을 따라 농경지, 집수지, 배수지도 보였다. 4개나 발견된 우물터는 한국 고고학을 통틀어 첫 발견이다. 청동기 시대 취락 유적 동천동으로 들어가 보자.

◆팔계천, 함지산 자락에 둥지 튼 선사유적=유적이 발견된 곳은 대구시 북구 동천동 일대. 1997년 칠곡택지 3지구 아파트 공사 도중 선사 유적이 발굴돼 영남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을 담당했다.

유적이 자리한 곳은 동명 뜰이 넓게 펼쳐친 팔계평야의 서북부 지점. 멀리 남쪽으로 금호강이 지나고 동쪽으로는 함지산이 우뚝 서있다. 서쪽으로 완만히 흐르는 팔계천은 충적지를 넉넉히 적셔준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 흔적, 고상가옥, 우물, 야외 불땐 자리, 집수장, 경작지, 환호 등 모두 200여기의 유물, 유적이 조사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의식주와 농경, 장송, 제례문화 등 고대 생활사 흔적이 한곳에 집중된 것이다.

주거지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수혈(竪穴) 건물지는 모두 60곳. 수혈이란 땅에 20~50cm의 땅을 파고 기둥을 박은 후 그 위에 움막을 얹는 주거 형태를 말한다. 원형의 집자리에 작업용 구덩이가 배치된 이른바 '송국리형 주거' 형태다. 이를 근거로 동천동 유적은 청동기 후기 유적으로 분류되었다.

청동기 전기에 주민들은 대체로 집단생활을 했다. 집터도 강당형태인 장방형(長方形)이 주를 이룬다. 아마도 씨족단위 생활을 했던 신석기 시대의 전통이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후기로 들어오면서 2~5인 단위로 주거 구성형태가 바뀌는데 이른바 단독 세대의 출현이다.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가족 간 유대나 개인 사생활이 점차 중요시 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고상가옥 미스터리=주거 양식과 관련해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고상가옥 미스터리. 동천동에서는 큰 원두막 같은 지상식 건물 일종인 고상가옥 20기가 발견되었다.

그 용도를 놓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창고, 주거, 망루, 병영, 신전(神殿), 집회소, 공동작업실, 접빈실 등의 용도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의 별장과 같이 여름 휴양시설로 쓰였다는 견해도 있다.

우리문화재연구원의 유병록 연구원은 "고상가옥에도 대소의 구분이 있다"며 "소형은 망루나 창고 중형 이상은 주거용으로 추측된다"고 정리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영남문화재연구원(경주) 하진호 연구실장은 "이곳 고상가옥은 농경지나 구(溝) 같은 농사시설 주변에 집중된 것으로 보아 임시 곡물저장소로 기능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동천동 유적일대에서는 모두 90기의 수혈유구(竪穴遺構)가 조사됐다. 수혈유구란 크고 작은 구덩이들을 말한다. 수혈의 용도에 대해 학자들은 우물이나 저장 공간, 수납고나 쓰레기장 용도로 추정하고 있다. 구덩이에서 석기 제작과 관련된 돌들이 나오면 작업시설로, 숯이나 불땐 흔적이 발견되면 요지(窯址)나 노지(爐址)로 분류한다.

◆한국 선사유적 최초로 우물 발견=동천동 유적에서 가장 흥미로운 유적은 우물. 모두 4곳이 조사됐다. 우물은 인류가 본격 정착생활에 들어갔음을 증명하는 직접적인 증거로써의 의미를 갖는다. 우물 유적은 다음 기회에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한다.

방어 및 구획시설과 관련된 유적으로 환호도 나왔다. 환호는 취락을 감싸는 도랑 유적을 말한다.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주변취락과 긴장관계에 의한 방어시설, 야생동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된다. 이 유적에 대해서도 다음 회에 상술하기로 한다.

이 외에도 팔거천 유역에서는 농경지(추정)와 도랑의 흔적인 구상유구(溝狀遺構)도 다수 확인 되었다. 이를 근거로 볼 때 지역에서 벼농사를 비롯한 광범위한 농경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구상유구나 하도(下道), 집수지 시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대부분은 물길과 연결되는 배수로의 기능으로 보이자만 일부는 경작지와 관련된 경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거지역-묘역-농경지-제사유적'으로 정형화된 동천동 유적은 고고학계에 '동천동 유형' 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을 만큼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진주 대평 유적이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취락유적을 규정했다면 부여 송국리와 대구 동천동은 후기 청동기 유적을 대표한다.

지금도 동천동 유적은 수혈건물지 시기 구분, 고상건물 용도, 수혈의 목적, 환호, 취락 유형 등에서 학계의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청동기시대 마을을 긴 잠에서 깨워놓은 유적지는 발굴이 끝난 후 다시 후손들의 삶의 거처(아파트)로 돌아갔다.

지금은 발굴보고서의 사진에서나 유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선사시대 한 획을 긋는 획기적인 유적이라는데 이런 홀대(?)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원형을 보존할 수 없었다면 박물관을 짓거나 취락모형이라도 세웠더라면 섭섭함이 덜했을 것이다.

※알려왔습니다=1일 자 '동천동 취락유적' 기사에서 '팔계천'은 '팔거천'(八筥川)으로 바꿔야 한다는 독자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전직 교사 김태위 씨는 "지금 고고학 사전이나 인터넷에 표기돼 있는 팔계천은 팔거천의 잘못된 용례이므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지적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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