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천재성과 싸가지

입력 2014-02-24 07:10:59

러시아에서 '국민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고 있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하는 시로 잘 알려진 알렉산드로 세르게비치 푸시킨은 아프리카 흑인의 후손이다. 그의 외증조부인 아브람 페트로비치 한니발은 러시아에 노예로 팔려오는 배 안에서 러시아어를 모두 익힐 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어린 한니발을 직접 본 표트르 대제는 한니발 대부가 되어 교육을 시키고 관리로 등용을 했다. 한니발의 피를 받은 푸시킨은 학교에서 러시아어와 프랑스어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과목에서는 거의 모든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종합 성적으로 따지면 꼴찌에 가까웠지만 그의 동급생 친구들은 그의 문학적 재능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졸업할 때 학교에 '여기 천재가 있었노라'는 표지석을 세우기도 했다.

 만약 한니발이나 푸시킨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 중종 때 갖바치와 같은 인물도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기득권층이 등용을 거부했던 것을 보면 한니발과 같은 흑인 노예가 양반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푸시킨은 작달막한 키에 혼혈에다 성적은 꼴찌였기 때문에 오늘날 학교에서 왕따나 빵셔틀이 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국어를 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천재로 존경받기는커녕 남들의 국어 내신 점수를 까먹는다는 비아냥을 들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그가 설령 천재적 재능을 발휘한 작품들을 쓴다고 해도 명문 대학 출신 비평가들의 혹평에 시달리거나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듣고 다녀야 할 것이다.

 원래 천재들은 언행에서 남들과 다르게 튀는 부분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천재의 능력을 따라갈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은 천재를 질투하기 마련인데, 그 질투의 표현이 바로 튀는 부분을 들어 '싸가지가 없다'고 공격하는 것이다. '싸가지'는 사전에서 '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뜻하는 '싹수'의 방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윗사람이 보기에) 예의 바름,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자기를 낮춤'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 사회에서 '싸가지가 없다'는 평을 듣는 것은 사회성 면에서는 치명적인 것이다. 그래서 능력이 부족한 다수가 천재적인 한 사람을 공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싸가지'를 언급하는 것이다.

 얼마 전 대통령께서는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 선수의 귀화 과정에 부조리가 없었는지 조사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조사의 주 대상이 되는 파벌 조성과 줄 세우기 문제는 우리 사회 어느 곳이든 없는 곳이 없으니 부조리라고 하기도 어렵다. 이런 부분들도 계속 고쳐 나가야겠지만, 이번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우리가 진짜로 반성해야 하는 것은 천재성을 먼저 보려고 하지 않고 싸가지를 먼저 찾으려고 하는, 혹은 싸가지를 이유로 천재성을 묻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일 것이다.

능인고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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