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걸 납작 엎드린, 이름도 모를 작은 식당을 찾아…
강원도에 갈 때마다 막국수를 실컷 먹어 보고 싶었다. 머릿속 계획은 그렇게 잡고 가지만 실천에 옮기기가 그리 쉽지 않다.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 좀처럼 외식은 하지 않는 데다 큰맘 먹고 그렇게 하려 해도 좀처럼 박자를 맞출 수가 없다.
첫날 아침, 점심은 미리 준비해간 찰밥을 휴게소 퍼걸러 밑에서나 아니면 길거리에서 먹어 치운다. 오후에 어시장에 들러 생선회를 준비하면 저녁과 다음 날 아침까지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통상 아침밥은 맑은 생선뼈국을 끓여 먹다 남은 식은밥이나 라면 몇 개로 때워버린다. 찬스는 다음 날 점심인데 움직이다 보면 유명 막국숫집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버릇대로 길가 정자에서 간단하게 마음의 점을 찍을 때가 태반이다.
새해 들어 첫 여행지를 강원도로 잡고 2박 3일 동안 두 끼쯤 막국수를 먹을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우리의 불문율을 깨고 첫날 점심부터 사 먹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어느 지인에게 얘기 들은 대로 진부IC 부근 작은 다리걸에 납작 엎드리고 있는 이름도 모르는 자그마한 막국숫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당초 계획은 면온IC에서 내려 이효석 생가에 들렀다가 막국숫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국숫집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터수여서 순서를 바꿔 점심 장소부터 먼저 확인하기로 했다. 희미한 가르침대로 진부에서 내려 다릿목 부근을 찾아가니 남경막국수(안복순'033-335-8968)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한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효석 생가로 향했다. 생가 어귀는 개활 평지여서 매운 눈바람이 바람막이를 거치지 않고 밀려와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 그래도 문학관까지 두루 돌아보고 식당을 찾아가니 늦은 점심때였다. 돼지수육과 메밀전을 시켜 빈속에 밀어 넣고 술 한잔을 끼얹었더니 배 속이 백열등을 켠 듯 대낮같이 환해졌다. 세상은 이래서 살맛이 나는데, 어제 죽은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몰라도 육수에 동치미를 섞은 물막국수도 먹을 만했다.
지지난해였나. 속초 청간정 옆 군인호텔에서 나흘쯤 머물면서 제대로 된 막국수를 먹어본 적이 있다. 그 기억을 살려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에 있는 동루골 막국수(033-632-4328)를 찾아, 면발의 색깔이 까무잡잡한 거의 원형에 가까운 메밀국수를 먹어볼 계획이었다. 혹시 길 찾기가 어려울까 봐 노트에 대명 콘도미니엄을 지나 잼버리 축제장을 돌아 하일라밸리에서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된다고 꼼꼼하게 적어 두었다.
또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속초 물치항 농협 옆 골목에 있는 샘 막국수(033-673-8265)를 찾아가 오랜 노하우가 빚어낸 살얼음이 낀 막국수를 맛보려 했다. 이 집은 값도 쌀 뿐 아니라 메밀국수는 물론 메밀만두와 메밀부침개가 일품이다. 이 집 안주인은 원래 양양 비행장 옆 실로암 막국수(033-671-5965)식당의 맏며느리로 주방을 총괄한 메밀 음식의 명인급에 드는 사람이다. 풍문에 의하면 이혼한 후 이곳에서 샘을 개업했다고 한다.
실로암은 한때 강원도를 대표하는 메밀국숫집이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도 임원 몇 사람을 대동하고 서울 계동 사옥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띄워 6천원짜리 국수 한 그릇을 먹으러 자주 왔다는 집이다. 지금도 손님이 그리 많지 않고 운만 좋으면 정 회장의 단골 자리에서 느긋하게 메밀국수를 즐길 수 있다.
실로암은 며느리가 독립해 나간 후 주인이 바뀌면서 음식상에 설탕시럽과 새콤달콤 소스가 오르는 등 퓨전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래서 강원도를 찾을 때마다 들르던 단골들도 "왜 맛이 변했느냐"고 불평을 쏟아내면서 수소문 끝에 실로암의 옛 맛을 지키고 있는 샘 막국수 쪽으로 몰리고 있다고 한다.
샘 막국숫집에 가서 안주인에게 "맛이 옛날 그 맛인데 실로암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맞지요"라고 단도직입으로 찔러도 분명한 대답을 듣기가 어렵다. 그럴 때마다 안주인은 웃기만 하다가 "저희 집은 샘 막국숫집입니다. 그냥 맛으로만 판단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고작이다.
입맛에 맞게 음식을 내주는 셰프(chef)가 떠나버린 음식점은 더 이상 단골이 될 수 없다. 취향에 맞는 커피를 끓여주던 바리스타(barista)가 옆집으로 옮겨 갔다면 그 옆집이 나의 단골 커피숍이 될 수밖에 없다. 단골집은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맛을 주관하는 사람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나도 일 년에 한 번쯤 가는 막국숫집을 샘으로 옮겨야겠다. 옛 맛은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게 좋기 때문이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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