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열등의 추억…매일신문 독자들 가슴 속의 백열등

입력 2014-02-15 08:00:00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백열등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백열등이 안녕을 고하는 이 시점에서 독자들이 갖고 있던 백열등에 관한 추억을 모아봤다. 전기로 켜는 신기했던 빛에 대한 추억 속으로 빠져보자.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학생, 쑥떡 좀 먹어 봐요∼"

지금부터 45년 전 나는 40여 리 떨어진 읍내에서 마을 친구와 둘이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자취를 하려고 구한 집에는 방이 두 칸 있었는데 큰방과 부엌 하나에는 주인인 신혼부부가 살고 친구와 나는 작은 방에 살았다. 그때만 해도 전기를 아끼기 위해 주인부부는 자신들과 우리가 사는 방의 벽에 큰 구멍을 뚫어놓고 거기에 등을 하나 달아 두 방이 백열등 하나로 같이 사용하게 만들었다. 신혼부부였던 주인아줌마는 늘 백열등을 미리 끄지 않고 우리가 끄도록 배려해 주셨다.

자취 생활이 조금 익숙해지고 주인아줌마와 가까워져 가던 4월쯤 중간고사가 시작되어 밤늦도록 공부를 할 때가 많았지만. 친구는 잠이 많아 늘 일찍 잘 때가 많았다. 중간고사를 하루 앞둔 어느 날, 나는 학교에 가다가 친구를 놀려 주고 싶은 마음에 "친구야, 어제저녁에 큰 방 주인아줌마하고 아저씨가 네가 잠들고 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난 참 좋은 구경 했다"고 슬쩍 거짓말을 했다. 친구는 "그 아까운 걸 혼자 봤단 말이냐"고 했고 나는 "다음에 또 구경거리 있으면 깨워 줄게"라고 약속했다.

그날 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고 친구는 공부하다 봄철 노곤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주인아줌마가 왔다. "학생, 쑥떡 좀 먹어 봐요"라는 아줌마의 목소리에 친구는 잠이 깼다. 그런데 내가 깨우는 줄로 착각한 친구는 "응, 오늘 밤에 또 사랑에 빠졌나?" 한마디 하고는 백열등 구멍에 매달려 큰 방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주인아줌마는 부끄러웠는지 쑥떡만 두고는 가버렸고 그 뒤로는 우리를 만나면 한동안 못 본 체하면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2학년이 되던 그해 봄 소풍날, 주인아줌마는 예쁜 쌍둥이 여자 아이를 낳으셨다.

우리는 벽 중앙에 달린 백열등 하나로 공부해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서 잘 지냈고, 졸업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비록 주인집 부부 두 분은 돌아가셨고 쌍둥이 딸들도 이제 시집 가 아이를 낳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댁과 연락을 끊지 않고 있다.

안영선(대구 수성구 청수로)

◇백열등으로 사과도둑 쫓기

"K주사! 어젯밤에 안 지키고, 뭐 했어요? 탱자나무울타리 좀 보소! 마구 잘려 있네. 아이∼구! 이런! 가장자리에 있는 사과는 다 따 버렸네."

1978년 내가 한 시골에 연구주임교사로 근무할 때 일이다. 이 날 교장선생님은 학교 도서관 곁 사과나무 밭을 둘러보시던 중 K주사를 불러 불호령을 내렸다. 누군가가 자꾸 사과나무밭에 들어가 사과를 자꾸 훔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막아보고자 만들어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도 다 망가져 버리자 교장선생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사과를 지키기 위해 고민이 많았다. 교무회의 때도 수시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아무도 뾰족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하나의 방안을 제안하였다.

"사과밭 주변에 나무기둥을 세워 거기다 백열전구를 매달고 K주사가 도서관 끝에서 밤마다 지키면서 스위치를 5분 간격으로 껐다 켜면 훔치러 들어온 사람은 놀라서 달아날 것입니다. 게다가 백열등이 사과나무밭 주변에 9개가 달려 한꺼번에 켜지면 주변이 대낮같이 밝아지니 아무도 들어올 생각을 못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제안한 아이디어로 즉시 전깃줄과 100와트 백열전구, 소켓을 사 왔고, 나무 기둥을 세웠다. 이제 전구를 달아서 시범으로 교장선생님께서 밤에 스위치를 한 번 넣어 보았다, 그렇게 밝을 수가 없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받았다. 붉은 사과가 달린 사과밭에 어둠이 내리고 밤이 되었다. 이제는 설치한 스위치만 누르고 있으니 시골에서 칠흑같이 컴컴했던 밤이 대낮처럼 밝아서 아무도 사과밭에 범접하지 못했다. 나의 아이디어로 그렇게 학교농장 사과밭의 사과를 지키게 되었다. 이 방안으로 나는 학교 안에서 '아이디어 맨'으로 불리며 주변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영백(대구 수성구 상록로)

◇ '호기심 소년'의 최후

내가 7살 때인 1990년 부모님이 장만해 준 책상은 2층 책꽂이가 정면에 설치돼 있는 형태였다. 기본 등이었던 형광등이 1층 부분에 길게 박혀있었고 백열등은 '보조 등'이라는 이름으로 책꽂이 왼쪽 벽면에 박혀 있었다.

"형광등이 있는데 보조 등이 왜 필요하지?"라고 했던 내 생각은 정말 짧은 생각이었다. 형광등보다 보조 등으로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특히 가장 많이 썼던 건 '청사진 만들기'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슬기로운 생활' 내용 중 감광지 위에 물체를 올려놓고 빛을 쪼인 뒤 물로 씻어내면 물체가 있었던 부분을 빼놓고는 파란색 또는 보라색으로 색깔이 변한다는 내용의 실험이 있었다. 이때 보조 등으로 있던 백열등이 아주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빛도 강하니 감광지에 명암 대비가 확실하고 색깔도 꽤 진하게 나왔다. 나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자주 감광지를 사서 보조 등으로 청사진을 만들었다.

사건이 있었던 이 날도 여느 때와 똑같이 청사진을 만들고 있었다. 노란빛의 보조 등으로 청사진을 다 만든 뒤 나는 전구에 슬쩍 손이 스쳤다. 손이 덴 것처럼 따끔거리자 '아, 전구는 원래 뜨거운 거구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때 갑자기 한 줄기 호기심이 나의 뇌리를 스쳤다. "켜진 전구를 차갑게 만들 수 없을까?"

그런데 '전기는 물에 함부로 가까이 대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식혀야 할지 고민이었다. 결국 청사진 씻을 때 떠 놓은 대접의 물이 보였고 호기심에 나는 이 물을 젓가락으로 살짝 찍어 전구에 댔다. 그 순간 갑자기 '팍' 소리와 함께 전구가 깨졌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책상 아래로 엎드렸다. 방의 형광등을 켜 보니 아니나다를까 책상 위는 깨진 전구 파편과 엎드리면서 흘린 물 때문에 난장판이 돼 있었다. 소리에 놀라 어머니가 들어오셨고 그 이후는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 혼쭐이 났을 거다.

이후 보조 등은 어느 순간 '먼지만 쌓이고 형광등보다 더 쓸 일이 없다'는 이유로 전격 철거(?)됐다. 하지만 이사하면서 책꽂이에 붙어 있던 형광등도 망가져 버려 결국 백열전구를 끼우는 스탠드를 사서 쓰고 있다. 아무래도 백열등의 그 따뜻함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그때의 추억이 백열전구 스탠드를 찾게 만든 것 같다.

이 모(대구 동구 신암로)

◇백열등과 보리타작

1969년쯤으로 기억한다. 필자의 고향마을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집집마다 백열등(당시에는 형광등이 없었다)이 켜지자 어둡던 시골 동네는 낮처럼 환해졌다. 백열등은 호롱불보다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무엇보다 그을음이 끼지 않아 좋았다. 어른들은 "그것참 희한한 물건이네"를 연발했고, 아이들, 특히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더 이상 호롱불 밑에서 숙제를 하지 않아 좋았다.

보리'밀 수확 철과 모내기가 겹치는 6월은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농번기라 농촌의 모든 일손이 동원되는 시기다. 나 역시 어릴 때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 중 가장 하기 싫었던 일 중 하나가 '보리타작'이었다. 보리타작을 하다 보면 가끔 바싹 마른 보리 수염이 속옷 안으로 들어가 까칠한 가시 같은 수염이 연하디 연한 속살을 사정없이 찌르기 때문이었다. 수염을 꺼내야 하는데 그만둘 수가 없다. 손발을 맞춰 일을 하다 보니 나 혼자만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계가 멈출 때까지 참아야 한다. 그 고통은 백열등이 없었던 때는 짧았다. 해가 지면 보리타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온 이후부터는 달랐다. 밤에도 보리타작을 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보리타작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보리타작을 하던 중 어두워지면 아버지는 백열등 소켓 옆에 달려 있는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는 긴 전선을 연결해 바깥마당으로 전기를 끌어냈다. 그리고는 긴 장대에 전선을 매달고는 장대 끝에 백열등을 꽂았다. 타작마당에 매단 백열전구는 100촉(당시에는 W를 촉(燭)이라 부름)짜리 두 개였다. 집 안에는 대부분 30촉(화장실은 5촉)짜리 전구을 사용했다. 100촉 전구 두 개를 달았으니 타작마당은 낮처럼 환해졌다. 백열전구 덕분(?)에 보리타작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타작이 끝날 때까지 몸 안에 들어온 보리 수염들은 온몸을 간지럽히는 장난(?)을 쳤다. 그래서 필자는 백열등을 보면 보리타작 하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난다.

백열등이 올해부터 한국에서 사라지고 그 자리는 전력 효율이 뛰어난 할로겐이나 LED로 대체된다고 한다. 하지만 백열등이 밝혀 준 따뜻한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김재수(대구 수성구 범물동)

◆많은 독자들께서 재미있는 글들은 보내주셨습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정리'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