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가족 문화유산을 남기자

입력 2014-02-11 11:10:35

우리는 인류 최고의 문자인 한글을 보유한 민족이다. 또 임금에게도 자신의 재임 중 기록은 열람을 허용하지 않았던 조선왕조실록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빛냈다. 세계 최고의 목판 활자본과 금속 활자본도 자랑한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개인사가 모여 지역사가 되고, 지역사가 다시 국사가 되고, 국사가 이윽고 세계사가 된다. 즉, 개인의 기록이 없으면 인류의 역사가 태어나지 못한다. 기록은 곧 인류 문화 발전의 밑거름인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의 생생한 기록을 일기로 남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잘 증언해준다. 이순신은 왜적과 싸우는 전쟁 와중에도 난중일기를 썼다. 원균은 쓰지 않았다. 이순신과 원균의 가장 큰 차이는 일기를 썼는가, 아닌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이탁영도 정만록이라는 전쟁 기록을 남겼다. 그는 신분이 높지 않았고 당파와도 관련이 없었으므로, 이런저런 이유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꾸며댈 필요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러한 덕목에 힘입어 정만록은 많은 임란 기록 중에서도 특별히 보물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보통 사람' 이탁영의 실천은 우리에게 훌륭한 시사가 된다. 말과 글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삶을 차별화한 결정적 요소이므로 당연히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글로 기록하여 남겨야 한다. 물론 그 글은 성명을 나열하는 족보 수준을 뛰어넘어 자신이 이승에 와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며 살았는지를 담아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인류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수 있고, 좁게는 직계 후손에게 존재감을 남길 수 있다. 이탁영은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하지만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는 민족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의 1998년 4월 15일 자 논설이 '한국의 IMF 위기는 암기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회 지도층의 국가경영 능력 부족 탓'이라고 진단한 것은 정말 '나라 망신'이었다. 역시 지식기반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개인이든 국가든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근래 들어 자신의 전기를 남기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라시대 문무왕이 남긴 유언의 참뜻을 현명하게 헤아린 사람들이다. 문무왕은 '거대한 무덤을 남겨봐야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굴을 팔 것'이라면서 '동해에 뼛가루를 뿌려주면 왜구를 지키겠노라'라고 유언했다.

사람은 누구나 무덤의 유한성을 안다. 조상의 무덤은 부지기수이지만 직접 찾아가 절을 할 수 있는 묘소는 몇 되지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그 조상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옛날 선비들은 반드시 문집을 남겼다. 문집이 없으면 그는 선비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현대 사회의 전기는 전통 사회의 문집 전통을 이을 만한 가족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한 가지 더, 후손에게 물려줄 만한 가족 문화유산으로 장려할 만한 것이 있다. 초상화이다. 사진기가 없었던 20세기 이전 인물의 사당에 초상화 영정이 걸려 있는 것과 달리, 영양의 '여자 안중근' 남자현 사당에 의사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독립운동 시기만 해도 사진은 귀한 물건이었다. 남자현 의사의 사당에 그분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예술 사진으로 볼 수 없는, 심지어 전화기로 찍은 사진까지 남발되는 세상이다. 조상을 기리는 진영으로 쓰기에는 사진이 가치를 잃었다는 말이다.

전통사회의 상류층이 초상화를 남긴 까닭은 자명하다. 그것이 예술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더 보탠다면, 남들이 초상화를 남기지 않는다는 희귀성에 매료되기도 했으리라.

초상화라면 윤두서의 국보 자화상이 유명하다. 그렇다고 모두 그런 걸작 초상화를 남길 수는 없다. 하지만 윗대 선조의 모습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켜 마음으로 모실 정도라면 최고의 문화적 상류층임에 분명하다. 모든 왕들이 다 만드는 능 대신에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대왕암을 조성한 신문왕이 훨씬 효자가 아닐까.

정연지/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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