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처의 인문학, 음악을 말하다]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입력 2014-01-25 08:00:00

청라언덕 위에 새겨진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의 동무생각 노래비
청라언덕 위에 새겨진 박태준 작곡, 이은상 작사의 동무생각 노래비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어릴 적 부모님이 쓰셨던 낡은 국정교과서에서 '동무생각' 악보를 처음 보았다. 단순한 가락 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따라 낭만적인 가사들이 멋있어서 노래를 쉽게 배워버렸다. 동무생각은 멜로디와 가사가 주는 이미지처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사랑과 우정을 노래한다.

이 곡은 작곡가 박태준이 마산 창신학교 시절 만든 곡으로 동료 교사였던 이은상이 가사를 썼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 시절 날마다 자신의 집 앞으로 등교하는 유인경이라는 신명학교 여학생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짝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혼자 애태우고 사모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후에 그의 애틋한 짝사랑 이야기를 들은 이은상이 즉석에서 가사를 써주었다. 그 바람에 동무생각이라는 새로운 한국가곡이 탄생하게 되었다.

동무생각은 4분의 4박자, 매우 단순한 리듬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사랑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며 순수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최근에는 대구시에서 박태준의 삶과 음악,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작 오페라 '청라언덕'을 만들어 해마다 대구오페라축제에 올리고 있다.

동무는 친구의 순 우리말이다. 하지만 격동의 시절을 거치면서 동무는 사회주의식 용어가 되어버렸다. 해서 지금은 아무도 동무라는 이 다정하고 친근한 말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벗이나 친우라는 말도 거의 쓰지 않는 낡은 말이 되고 말았다.

동무생각은 청라언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 일대 선교사 사택은 지금도 변함없이 푸른 담쟁이로 뒤덮여 있다. 이곳은 일찍이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동산을 사들여 대구 선교의 중심으로 삼은 곳이다.

청라언덕은 멋진 경관에다 박태준과 유인경의 이야기가 곁들여져 더욱 로맨틱한 장소가 되었다. 이들이 청년기를 보낸 시대는 연애의 시대이기도 했다. 오늘날과 달리 그 시대의 연애는 사적인 차원을 떠나 봉건적인 관습과 낡은 것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신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의 새로운 문화 코드이기도 했다. 또한 연애는 정신적인 사랑을 통해 평등한 남녀 관계를 도모하려 하는 것으로 육체적 순결은 필수조건이었다.

남녀가 서로 얼굴을 맞댈 기회가 거의 없던 사회에서 교회는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또한 교회는 새로운 평등사상을 배우고 경험하는 장소였으며 기독교의 평등적 박애주의는 당시 연애(사랑)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기독교 계통의 계성학교를 다닌 박태준과 신명학교를 다니던 유인경의 이야기는 비록 짝사랑에 그친 것이지만 가사에 담긴 내용처럼 청년의 순수함과 때 묻지 않은 이상이 묻어 있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청라언덕은 당시 신식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꿈꾸는 미래의 가정, 다시 말해 붉은 벽돌로 지어진 뾰족 지붕에 계몽과 문명개화의 도구인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단란한 스위트홈의 표상을 모두 갖춘 곳이었다. 더구나 박태준은 피아노를 칠 줄 알 뿐만 아니라 작곡을 공부하는 음악도였다. 따라서 동무생각은 최첨단 문화 코드를 모두 포함한, 근대의 고상한 이상과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최신의 음악이라 할 수 있었다.

동무생각은 더 구체적으로는 남녀평등에 입각한 자유연애, 일부일처제, 행복한 가정, 서구적 교양과 양식을 갖춘 배우자 등 당시 신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지향하는 근대적 가치를 모두 함축하고 있었다.

모임에서 청라언덕을 다녀온 칠순의 노모가 학창시절을 생각하는지 하루 종일 동무생각을 명랑하게 부르고 계신다.

서영처 영남대학교 교책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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