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지/화가 gogoyonji@hanmail.net
757년, 신라 경덕왕은 우리말 땅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꾼다. 달구벌이 대구(大丘)로 바뀌고, 설화가 화원(花園)으로 바뀌고, 노사화가 자인(慈仁)으로 바뀌고, 모혜가 기계(杞溪)로 바뀐다.
물론 달구벌 등도 당대인들이 불렀던 이름 그 자체는 아니다. 이두식 표기일 뿐이다. 그 결과, 우리말 땅이름은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자취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왕건도 이곳저곳 이름을 바꾼다. 경주, 청도, 의성 등이다. 경덕왕이 고창(古昌)으로 바꾸었던 고타야가 다시 안동으로 변한 것도 왕건 때 일이다. 땅이름을 바꾸는 일에는 그렇게 정치적 타산이 숨어 있다.
땅이름 변화의 가장 안타까운 예는 일제가 1914년에 붙인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마땅히 우리말 땅이름으로 되돌려야 하고, 이미 자취마저 없어져 불가능하면 경덕왕 때 것으로라도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100년이 되었다며 기념식을 여는 국적 불명의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말 땅이름 되찾기는 요즘 논란 중인 도로명주소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도로명주소 정책이 일제 잔재 청산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국토를 잃으면 '번지 없는 주막'이 생기는 것이야 당연한 법, 주막에 주소를 붙이는 것보다 땅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이다. 작은 주소 바꾸기보다 큰 땅이름부터 되돌리는 것이 순서에 맞기 때문이다.
땅이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 길은 저절로 생겨난다. 땅에 이름이 붙으면 길은 자연스레 그 이름들을 따라 이어진다. 그래서 친자연적인 우리의 조상들은 땅이름으로 길을 찾았다. 서당길, 교동, 둑길… 식이다. 서당으로 가는 길은 서당길, 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동, 방죽 따라 난 길은 둑길로 불렀다.
그렇게 우리의 전통 주소는 도로명이 아니라 땅이름에 따랐다. 마을, 역사, 인물을 기준으로 삼았다. 산, 강, 들도 중시했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수신의 공간으로 인식한 결과이다. 황석영 단편 '삼포 가는 길'이나 방은진 영화 '집으로 가는 길' 같은 제목이 우리에게 익숙한 까닭도 그 덕분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풍향교를 찾을 때면 모두들 "현풍향교,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묻는다. 지번을 들어 "상리 326-1, 어디로 갑니까?" 하거나, 도로명주소로 "현풍동로 20길 27-8,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묻지 않는다. 지번주소가 일제 잔재라면 도로명주소는 서양을 흉내 낸 문화적 사대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도 한결같이 그렇게 묻고 대답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전통이자 문화이며 정신이다.
그런데도 권력자들은 늘 중국, 일본, 서양식을 추종해 왔다. 현재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속성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경직되고 만다는 진리를 그들은 애써 무시한다. 인간이 낳은 썩은 물과 굳은살은 자연이 낳은 화석과 대조적이다. 화석은 연구의 대상이지만, 썩은 물과 굳은살은 아무 가치가 없다.
썩은 물은 퍼내고 굳은살은 도려내어야 한다. 1941년부터 쓰인 '국민학교'가 바로 그렇다. 일제 잔재가 독립 이후로도 무려 51년이나 유유히 생명을 유지했다. 바꾸자는 주장이 쇄도했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야 초등학교가 되었다.
지번주소도 너무 오래 쓰여서 지금의 문제를 낳았다. 도로명주소도 잘못이 있다면 신속히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말 땅이름을 찾아서 되살리고, 역사와 문화유산, 공공적 개념을 부각시켜 우리의 민족혼이 도도히 흐르는 전통적 주소로 만들어야 한다.
'귀거래사'의 도연명이 답을 보여준다.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는 도중 도연명은 나그네에게 길을 묻는다. 29세부터 41세까지 다섯 차례 이상 귀향했던 도연명이 어째서 고향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일까? 그는 '새벽빛이 희미하여' 길이 어둡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전원 회귀에 성공한다. 벼슬길에 나선 지 그렇게 오래지 않아 '아직 멀리 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관건이다. 도로명주소도 굳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정연지/화가 gogoyon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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