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더 잘 안다 '신토불이' 그 느낌
'국산 장난감 하나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어요.'
대구 북구 태전동에 사는 주부 강민영(35) 씨는 최근 일곱 살짜리 아들이 원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하느라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아들이 자동차와 로봇 등으로 변신이 가능한 완구인 '또봇'을 사달라고 졸랐기 때문이다. '토이저러스' 등 완구 전문매장에서도 이미 매진됐고 인터넷 사이트들을 뒤져봐도 품절이었다. 인터넷 쇼핑몰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놨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강 씨는 서울에 사는 동생에게 부탁을 했고 청계천 완구상가에서 어렵게 구입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2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4세 '또봇', 81세 '레고' 이겨
8일 오후 대구 동구 율하동에 위치한 토이저러스. 입구 가운데를 또봇 판매 전시장이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수입완구를 주로 판매하는 이곳에서 국산 또봇이 '닌자고' '레고' 등 외국 장난감을 밀어내고 주인공으로 등장한 셈이다. 그런데 진열대 곳곳이 비어 있다. 또봇이 워낙 인기라 일부 품목은 매진됐고 주문을 했지만 아직 제품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운지 아이들은 또봇 코너에서 눈을 뗄 줄 모른다. 또봇 자동차는 자동차와 로봇으로 변신이 가능하다. 최대 4단계까지 변신한다. 특히 C, D, W, R이 모두 '합체'한 '또봇 쿼트란'의 인기는 절정이다. 로봇에 대한 관심이 적은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도 또봇은 가장 갖고 싶은 장난감 중 하나다. 마침 이곳을 찾은 회사원 김정현(40) 씨는 "아들이 원하는 또봇 쿼트란을 구하기 위해 잠시 짬을 냈다. 그런데 다 팔려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다. 인터넷상에서는 7만원짜리가 20만원 이상에 팔리기도 한다"고 했다.
또봇의 인기에 카봇 등 대체(?) 장난감들도 덩달아 인기다. 모두 국산 장난감이다. 토이저러스 관계자는 "또봇을 구입하지 못한 손님 중 일부는 카봇이나 싼타페 등 비슷한 유형의 장난감을 찾고 있다. 또봇처럼 자동차와 로봇으로 변신이 가능한 카봇의 경우 하루 30여 개 이상 팔린다"고 했다.
이 같은 인기는 수치로도 증명된다. 실제 완구 업계에서 11'12월과 1월은 '토이워즈'라 불릴 정도로 장난감이 많이 팔리는 시기. 그해 1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팔리는 완구량이 한 해 전체 판매량의 40%에 달한다. 이 시장의 승자는 항상 글로벌 1위 완구 업체 '레고'였다. 그러나 올해는 그 영광을 국내 중소기업이 만든 '또봇'이 차지했다. 이마트 측이 집계한 지난해 매출액만을 따져봤을 때 또봇은 레고의 '키마'보다 33% 많았다. 또봇의 맹활약으로 토종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뽀로로'는 물론 '라바' '코코몽' '뿌까' '번개맨'까지…. 다양한 캐릭터가 시장을 달구는 중이다.
◆국산 캐릭터 시장 급성장
국산 캐릭터 시장도 뜨거워지고 있다. 1975년 TV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브이'가 토종 캐릭터 시대를 연 이후 40년 만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2012년 국내 캐릭터 산업 매출액은 약 8조원, 부가가치액은 3조7천억원에 달한다. 또 국산 캐릭터 점유율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인 반면 외국산 캐릭터 점유율은 감소하고 있다.
대형마트뿐 아니라 오픈마켓, 소셜커머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통 채널에서도 토종 캐릭터의 인기는 상한가다. 오픈마켓 옥션에서 또봇 판매량은 2012년, 2013년 각각 전년 대비 15배와 2배 가까이 늘었다. 또봇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토종 캐릭터 로보카폴리 역시 지난해 10배 가까이 판매량이 증가했다. 지난해 새롭게 부상한 라바도 빼놓을 수 없다.
수성구에서 완구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수형 씨는 "그동안 또봇과 로보카폴리가 국산 장난감의 양대 강자였다면 지난해에는 라바와 코코몽 등 새로운 캐릭터가 더해져 국산 캐릭터 상품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했다.
물론 10년 전에도 국산 캐릭터의 쿠데타(?)가 있었다. 2003년. '뽀통령'으로 불리던 뽀로로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레고 등의 인기를 잠시 눌렀다. 그러나 채 몇 년이 되지 않아 레고나 닌자고 등 외국산 제품에 주도권을 내줘야 했다. 그러나 2010년 들어 또봇, 로보카폴리 등이 등장하면서 국산이 제2의 전성기를 열고 있다. 서영철 롯데마트 토이저러스 담당은 현재 국산 캐릭터들이 유아용 완구 시장의 70~80%를 점하고 있다. OEM(주문자제작) 방식이 아닌 직접 애니메이션을 창작한 지 10여 년밖에 안 된 국내 애니메이션 역사를 감안할 때 의미가 있는 일이다"고 평가했다.
방송의 어린이 프로그램에서도 국산 캐릭터들이 맹활약 중이다. '닌자고'나 '호빵맨' 등 일본산 주인공에 밀려 외면당했던 국산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뮤지컬 형식의 '번개맨'과 만화영화 형식인 '로보카 폴리'가 어린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특히 번개맨은 단번에 어린이들의 영웅으로 등극했다. 번개맨의 옷과 망토, 번개스틱 등 관련 캐릭터 상품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번개맨과 함께 출연하는 '뚝딱이' '나잘난 더잘난' 등도 여느 캐릭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착한 캐릭터
최근 일고 있는 국산 캐릭터 붐도 뽀로로처럼 반짝하다 사라지지 않을까?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기우'라고 한다. 이들은 최근 토종 캐릭터의 성공 비결이 예전과 다른 형태인 만큼 생명력이 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박근배 대경대학 영상제작학과 교수는 "해외 캐릭터는 폭력적이고 단순히 아이들의 인기를 얻기에 급급한 작품들이 많다. 반면, 토종 캐릭터는 아이는 물론 부모들도 좋아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마디로 토종 캐릭터들은 한결같이 교육적이고 착하다. 지갑을 열 부모들 입장에서도 만족스럽다"고 설명했다.
일곱 살,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둔 최영호 씨는 아이들과 함께 로보카폴리를 보는 게 즐거움 중 하나다. 최 씨는 "로보카폴리는 구조대가 위험에 처한 친구들을 도와주는 이야기를 통해 양보, 배려, 용서하기, 가족의 소중함 등 아이들이 배웠으면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부모 입장에서 만족스럽다"고 했다.
TV뿐 아니라 스마트폰 등 다매체를 적극 활용했다는 점도 성공 비결 중 하나다. 예전 같으면 TV, 영화관 등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개봉한 뒤 관련 완구나 제품을 출시해 추가 매출을 올리는 게 순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스마트폰 등 다매체, 다채널 시대에 맞춘 광고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캐릭터계에 돌풍을 이끈 '라바'도 이런 환경에 맞춰 1분 30초짜리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특화해 인지도를 높였다. 지하철, 길거리, 스마트폰 등 어떤 환경에서도 즐길 수 있다.
'국산 캐릭터'라는 사실도 무시 못할 장점이다. 또봇이 레고를 제칠 수 있었던 비결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기아자동차를 소재로 해 현실성과 친근감을 높였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또봇 시리즈의 제품에 등장하는 소방차와 경찰차 등은 외국산인 레고와 달리 모두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박근배 교수는 "아이들은 길을 가다가도 이런 자동차를 보면 '또봇'이라고 외칠 정도로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이후 제작한 만화영화에서도 국산 캐릭터의 장점이 살아 있다. 주인공들은 한식을 먹고 한국식 예절을 따른다. 액션물이긴 하지만 폭력성도 훨씬 덜하다"고 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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