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 대구 왔을 때 심어
모 시민단체 대표 권상구 님으로부터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인 순종(純宗)이 대구에 왔을 때 심은 나무가 있다는데 알고 있느냐?'는 전화가 왔었다. 모른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현직에 있을 때 나무를 많이 심고, 보호수 지정도 획기적으로 늘렸는데 평민도 아닌 황제가 심었다는 나무를 모르고 있다니 말이 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료를 찾으니 '대구물어'(大邱物語>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다. 이 책은 일본인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쓴 것으로 향토사학자로 많은 업적을 남긴 고 손필헌 님이 번역한 것이다. 지존인 황제의 순행(巡幸) 모습을 일본인이 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아이러니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대구물어'는 관찬인 '대구부사'(大邱府史)와 함께 일제강점기 대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사료다.
'1909년 1월 7일 오후 3시 20분 궁정열차로 (황제가) 대구에 도착하셨다. 하늘에 영광이요, 땅에는 축복이라. 한'일 수많은 민중이 천지를 흔드는 환호 속에서 임금님이 탄 수레를 맞이하였다.
폐하의 차가 출발하자 군악대가 국가를 취주(吹奏)하는데 그 장엄한 기운이 사방을 제압하고 맞이하는 관리나 시민 모두가 최고의 경례를 드리는 가운데 폐하는 덮개가 없는 수레에서 가볍게 인사하시며 숙소에 들지 않으시고 의장병(儀仗兵)을 앞세워 행렬도 엄숙한 도열 속으로 지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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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는 남한 순행의 첫날을 대구에서 보내시고 이튿날 8일 오전 9시 10분 부산으로 출발하시는데 부산, 마산 순찰을 마치시는 12일에는 대구에 다시 오셔서 하루를 묵게 되시니 대구로서는 이중의 광영이었다.
황제 폐하의 귀경길인 12일 오전 11시 이등박문과 함께 마산으로부터 봉련(鳳輦'꼭대기에 금동의 봉황을 달아 놓은 임금님이 타는 가마)이 다시 대구에 안착하였다. 황제의 위엄은 앞서보다 더 장엄하고 시내의 장식도 지난번보다 더한층 화려했다. 당일 달성공원에 나오셔서 폐하 손수 식수와 이등박문의 기념식수가 있었다.'
이상은 순종황제가 대구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부산, 마산을 거쳐 대구로 다시 되돌아온 장면에 관한 '대구물어'의 기록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황제는 조칙(詔勅)을 통해 '짐이 생각하건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이에 시정개선의 대결심을 하고… 지방 각지의 소요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서민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으니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하물며 이 추위를 당한 백성의 곤궁함이 눈에 선한데 어찌 한시라도 금의옥식(錦衣玉食)에 혼자만 안주하랴…'라고 순행 목적을 밝히셨다.
그러나 왜 대구를 선택하였느냐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없다. 아마 1907년에 있었던 국채보상운동이 시사하듯 더 이상 방치한다면 대구가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지 아니할까 하는 우려를 미리 차단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심은 나무의 수종이 뭔지,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공원 관리계장 이대영'정시식 님과 함께 확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 계장이 일러 준 곳을 보니 크기가 비슷한 두 그루의 가이즈카향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계획적으로 심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뿌리 지름을 측정해 보니 공원 입구에서 오른편은 276㎝, 왼편의 나무는 285㎝였다. 당시 일본의 수식문화가 나이에 따라 심는다고 하니 이등박문은 66세, 순종황제는 33세였으니 더 굵은 것이 이등박문, 작은 것이 순종황제가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그 당당했던 이등박문은 그해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되고, 순종황제 역시 이듬해 8월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500여 년을 지켜온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고 만다. 이어 대구의 본향인 달성 역시 신사(神社)가 들어서는 등 더럽혀진다.
공원 한복판을 떡 버티고 있는 가이즈카향나무 역시 영광과 오욕을 함께 간직한 역사의 부스럼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손수 심은 나무인 만큼 잘 보존되었으면 한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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