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대구의 의미망

입력 2014-01-06 07:49:32

대학 동기들 모임에 가거나 다른 지역에 있는 교사들과 같이 일을 할 때면 사람들이 나한테 많이 하는 말이 대구에서 사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정치 이야기만 안 하면 대구보다 살기 좋은 도시가 없다고 열변을 토한다. 적당히 인구가 많아서 있을 건 다 있고, 서울처럼 복잡하지도 않다. 결정적으로 서울의 경우 교사 월급으로 내 집을 장만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 늘 집이 없는 불안정한 상태로 살거나 집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리가 휘어야 하지만 대구는 그렇지 않다. 대구에 며칠이라도 살아 본 사람들은 내 말에 공감하면서 대구 지역에 교수 자리 얻어서 주말 부부로 사는 게 구운몽의 주인공 양소유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직접 살아보지 않은 대구에 대해서 왜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그것은 바로 '대구'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다른 말들과의 연관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으면 그 말의 사전적 의미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연관된 말까지 함께 떠올리게 된다. 이것을 단어들의 의미가 그물처럼 엮여 있다는 뜻으로 '의미망'이라고 부른다. '성탄제'라는 시에 나오는 '산수유 붉은 알알이' 표현에서 '붉다'라는 말에는 '정열, 감성, 뜨거움, 사랑'과 같은 연관 의미들이 이끌려 나온다. 그래서 구구절절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풍부한 의미를 담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의미망은 선입견으로 작용을 한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대구와 관련되는 말을 말하라고 하면 30,40대들은 '무더위, 수구 세력, 고담, 대형 사고'와 같은 말을 떠올린다. 그러니 대구에 살면 힘들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 대구는 유교 문화가 강하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보수적인 도시는 아니었다. 경제 주권을 찾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던 곳도 대구였고, 지식인들도 침묵하던 시대에 독재 정권에 맞서 학생들이 떨치고 일어선 2'28 의거가 일어난 곳도 대구였다. 대구 기생 출신으로 독립운동의 꽃이 된 현계옥이나 기부의 여왕이 된 김울산과 같은 이들이 활동할 수 있었고, 이 사람들의 출신을 따지지 않고 존경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도 대구였다. 음악다방 '녹향'에 가면 교과서에 나오는 문인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던 문화의 도시였고, 동성로에 가면 신인 연기자를 발굴할 수 있다는 미인의 도시였다. 서울대 다음으로 사범대학이 생겨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던 교육의 도시였다. 한마디로 젊고 역동적이고, 대구시가 표어로 삼은 '컬러풀 대구'에 꼭 맞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였다.' 혹은 '였었다.'로 표현되는 과거형이다. 새해에는 과거 대구가 가졌던 다양성과 포용성이 살아나 좀 더 좋은 의미망을 가진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능인고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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