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백일장] 수필-유통기한

입력 2013-12-19 14:00:56

이지안(대구 수성구 범어1동)

여름이면 엄마는 복숭아로 병조림을 만들곤 했다. 새벽에 차를 몰고 전통시장까지 달려가서는 손수 몇 박스씩 골라오는 유난을 떨었다. 대대적으로 병조림을 담그는 날이면 엄마는 어린 내 손에도 칼을 쥐여 주었다. "이렇게 단칼에 큼직하게 잘라야 하는 거야." 엄마와 나는 마주 앉아 수백 개의 조각을 잘라냈다. 병조림이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담장의 방식임을 들었을 때 나는 복숭아가 싫어지려고 했다. 그렇게 빨리 물러지는 습성만 아니면 이런 고생도 할 필요 없잖아. 날 선 불만은 병조림 하나 따면 이내 입속에서 허물어졌다. 엄마가 늘려준 유통기한 덕에 겨울밤까지 혀끝이 달았다.

지난여름엔 어깨 너머로 배운 병조림을 내 손으로 담가 보았다. 엄마의 손맛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하나씩 꺼내 먹는 재미가 제법 달큰했다. 겨울밤은 유난히도 입이 심심해지는 법이어서 몇 안 되는 병조림은 금세 동났다. 무심히 꺼내 든 게 마지막임을 알았을 때, 나는 그 마지막 병을 차마 열지 못하고 있던 자리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마지막이라는 돌연한 자각이 비로소 남아있는 것을 소중하게 느끼게 한 것이다.

무엇이건, 끝이 있다는 자각을 처음부터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그러나 냉엄하게도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아무리 오래 먹고 싶어 해도 유통기한이 무한정한 통조림은 없는 것처럼, 인생이란 시간의 유통기한도 언젠가 반드시 끝이 있는 것임을 뒤늦게 알아챈다. 올해도 어느덧 마지막 달.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는 이 아이러니의 나날이 얼마나 더 남았을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12월에는 생의 마지막에 할 그 자각을 미리 연습하며 살아보고 싶다. 끝이 있음을 알기에 더 소중해지는 모든 삶의 순간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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