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人 세계In] <25·끝>재중국한국인회 회장 황찬식 씨

입력 2013-12-16 07:17:03

중국 대륙서 성공시대 연 '新조선족'

교민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황찬식 재중국한국인회 회장.
교민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황찬식 재중국한국인회 회장.
1월 베이징에서 열린 재중국한국인회 회장 이
1월 베이징에서 열린 재중국한국인회 회장 이'취임식에서 전임 회장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결의를 다지는 황찬식(사진 오른쪽) 한인회장.

"한국인으로서 중국에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법적, 제도적인 장벽이 너무 높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경주 출신의 재중국한국인회 황찬식(57) 회장의 관심은 온통 한인회에 쏠려 있었다. 그는 "중국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교민들의 수가 크게 줄었다"며 "불안해하는 교민들의 마음을 다잡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역시 한인회 회장다웠다. 그는 개인사와 고향 얘기보다는, 인터뷰의 상당 부분을 한인회와 중국 소식에 할애했다.

◆한인회장의 포부

"힘들게 회장이 됐어요. 불리한 상황에서 출발했는데 중국 곳곳을 뛰어다닌 덕에 이길 수 있었어요."

그는 지난해 12월 15일 재중국한국인회 총회에서 임기 2년의 제7대 회장에 당선됐다. 회장 후보에는 황 회장을 포함해 3명이 나섰다. 당초 9월에 총회가 열리기로 했지만 한 후보자의 국적 문제 때문에 3개월간 연기되면서 악전고투했다고 했다. 그는 "선거 때 잡음이 많았기에 이를 치유하고 서로 화합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한인회장인 그가 내세우는 화두는 '신(新)조선족'이다. '신조선족'은 한국인이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현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현재 중국은 인건비 급증, 높은 제도적 장벽 등으로 인해 한국기업들이 버티기 어려운 실정"이라며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한 문화적 이해뿐만 아니라 관습, 법 체계까지 철저하게 이해하는 신조선족이 돼야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여건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세계 최대의 시장에 등을 돌리고 물러설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는 "현재 교민 수 80만 명에 61개 지회를 갖고 있지만, 어려움을 겪다가 귀국하는 교민들이 적지 않다"며 "교민사회가 혹독한 구조조정 과정을 겪고 있어 한국 정부의 관심이 필요한 때"라고 했다. 또 한국인들이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북한 핵 사태 등의 문제가 생기면 혈맹관계인 북한을 두둔할 수밖에 없어요. 이를 무조건 비판하기 보다는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공조를 취할 부분을 찾아내야 합니다. 전략적인 사고가 필요하죠."

그는 "중국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잠시 와 있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 교민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라며 "교민들의 행복한 삶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리 한인회"라고 했다.

◆재기에 성공하다

'포기는 실패보다 더 무섭다.' 그가 늘 가슴에 품고 있다는 좌우명이다. 실패를 뼈저리게 맛보고 다시 일어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의 30대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후 코오롱에서 3년간 일하다가 개인사업을 벌인 것이 화근이었다. 봉제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젊은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 빚을 내 도장기계'설비사업에 재도전했다가 부도를 맞았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어요. 학력을 속이고 운전기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정말 먹고살기 힘들었어요. 집도 압류당하고 10만원짜리 월세방에 살면서 너무 고통스러워 생을 포기할까 생각도 많이 했지요." 이 얘기를 하는 순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는 3년간 먹고 자는 '백수' 생활만 하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마지막 도전을 위해 1996년 중국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중국 땅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자수성가한 한국인 사업가들과 비슷한 인생 역정이 아니던가. 사업자금이라고는 동생에게 빌린 3천만원뿐이었다. 중국 동북의 랴오닝성(遼寧省)의 철강도시인 안산에서 철강 원재료를 한국으로 수출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졌다. 그는 "처음에는 무엇을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철강 원재료 수출업을 하게 됐는데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며 "중국말 한마디도 못하고 사는 여건도 좋지 않은데 아이 둘을 데리고 살려니 무척 힘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과의 수출입을 위해 톈진(天津)을 자주 찾다가 5년 뒤 톈진으로 옮겨와 풍림호텔을 운영했다. 톈진을 찾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 호텔을 운영하면서 한인사회와 긴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해 톈진한국인회 회장과 톈진 한국상회(상공회의소) 회장을 거쳤다. 톈진한국인회 회장시절 가장 기억나는 일 중 하나가 2년 전 박승호 포항시장이 과메기 홍보를 위해 톈진에 들렀을 때라고 했다. 고향의 자치단체장이 특산물을 들고 찾아온 것도 이채로웠고, 과메기를 안주로 중국 술을 같이 마셨던 기억도 좋았다고 했다.

현재 KP 국제무역유한공사, A&Z 칠감유한공사, 베이징콘텐츠 밸리 유한공사, 톈진 로얄호텔 등 4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경주에는 막내 동생이 맡고 있는 에버스틸이라는 철강 원재료 납품 회사도 있다. 그는 "회사 숫자만 많을 뿐이지 규모는 '구멍가게' 수준"이라며 "중국에서 먹고살고 있을 뿐이지 어디에 자랑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고 겸손해했다. 그는 한국에 살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했다. "제법 자리를 잡고 살다 보니 그런지, 중국이 훨씬 편해졌어요.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죠."

◆내 고향은 경주

"어찌 고향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예전에는 가끔 찾아뵙고 했는데 한인회 회장을 맡고 보니 찾아가기가 쉽지 않네요."

그는 불국사초교와 문화중'고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같이 놀던 동창들과의 즐거운 추억 때문에 불국사초교의 동창회는 가능하다면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중'고교 시절 기차 통학을 했는데 우리는 '울통파'였어요. 울산 방면에서 오는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은 '울통파', 대구 방면의 기차는 '대통파', 포항 방면의 기차는 '포통파'라고 불렀지요."

그는 자신이 졸업한 초'중'고에 장학금을 내고 싶고 고향에 봉사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인회 회장을 하다 보니 들어갈 돈이 너무 많아 다른 데에는 엄두를 낼 수 없다고 한다. 각 지역의 한인회 행사마다 찾아다니다 보면 소요되는 경비가 만만찮다는 것이다. 황 회장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60세를 넘기면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뼈를 묻을 곳은 나고 자란 고향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박병선 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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