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피 흘리고 싸울 때 외국 여자와 놀다와선 무슨 대통령이냐'

입력 2013-12-07 07:19:35

해방 후 만난 이승만과 처음부터 대립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이다. 미국의 힘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한 권모술수가로 평하는 이도 있고 분단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평가도 나온다. 권력을 얻기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고 그들에 대한 민족적 단죄를 막은 잘못을 지적하는 이도 많고 추악한 독재 권력자로 폄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승만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하며 공로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먼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틀을 다진 것을 꼽는다. 의무교육 제도를 도입, 문맹률을 낮추고 대중교육의 기반을 확립한 것도 그의 공으로 친다. 해방 후 남한에서 좌우익을 통틀어 이승만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가 가장 높았던 까닭은 그가 정치 엘리트보다 농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지위 향상과 생활 개선에 노력한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농지개혁은 그들이 꼽는 구체적 사례다. 6'25전쟁의 와중에서 대한민국을 구출한 것도 이승만의 탁월한 외교력 덕분이라며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다,

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러나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다. 분단된 땅, 남한만의 정부였지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대통령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와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이승만은 누구 못지않게 일제에 저항한 항일 독립 운동가였다.

독립 과정만 본다면 이승만과 심산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다. 그러나 해방 후 만난 심산과 이승만은 처음부터 대립관계였다. 이승만이 김구와 손을 잡기 위해 노력한 부분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그러나 심산과 이승만이 손을 맞잡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심산과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방식도 달랐다. 이승만이 외교적 활동에 주력한 대신 심산은 망명 초기를 지나면서부터 무장투쟁으로 돌아섰다. 피 흘리며 투쟁한 이들과 함께한 심산에게 이승만의 외교적 활동을 높이 살 이유는 없었다. '남들 피 흘리고 싸울 때 외국 여자와 놀다 와서는 무슨 대통령이냐'는 식이었다. 해방 후 심산은 미군을 반기지 않았다. 그의 눈에 미군은 일제가 물러간 자리에 대신 들어선 외세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군의 환대와 지원을 받았다.

정부 수립을 위한 모체 기관으로 선정된 정무위원이 미 군정청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으로 바뀌면서부터 심산과 이승만의 대립은 격렬해졌다. 심산은 이승만이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면서까지 외세를 업으려 한다고 비판했다. 단독정부 수립과 그 후 이승만의 집권 내내 심산은 독재자 이승만 비판 선봉에 섰다. 반대 투쟁의 결과 심산은 대학교와 성균관 모두에서 자리를 잃고 만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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