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다섯 살인 아이가 첫돌을 지날 무렵, 아직 걸음이 서툴러 집안 순례를 마치고 나면 심심해하는 모습이 측은해 간혹 컴퓨터로 뽀로로를 보여줬다. 영상물을 접한 경험이 없어서인지 움직이는 만화를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하지만 녀석이 만화를 보는 중에 내가 컴퓨터를 쓸 일이 생기면, 갑자기 큰 창이 나타나 뽀로로를 덮쳤고 그러면 닫히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순순히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화면으로 다가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연 인터넷 검색창 뒤에 녀석이 보던 만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니터에 손바닥을 대더니 서툰 말로 "춰~"(치워라는 뜻)라고 하곤 내가 보던 창을 바깥으로 밀쳐버리는 시늉을 했다. 그때까지 녀석은 아이폰을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당연히 우리 부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제야 사용하기 쉬운 아이폰 조작법의 비밀이 풀리는 듯했다. 그것은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물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것이다. 이제껏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 화면의 '×' 버튼을 찾아서 누름으로써 창을 닫는 행위는 논리적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의 타고난 행동 방식에는 매우 어긋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아이폰의 이런 사용법을 나는 인간의 본능이 지향하는 바를 올바로 인지한 발견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능 속에 잠재해 있던 것을 비로소 끄집어 내 바람직한 사용 환경으로 구현한 것이다.
얼마 전 국악방송 홈페이지에 게시된 부산국악방송 개국 2주년 기념 공연 배너를 보았다. 제목이 '오래된 미래'였다. 2012년 옛 서울역 건물을 리모델링해 복합 문화 공간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렸던 개관전 제목 또한 '오래된 미래'였다. 그러고 보니 전통악기 해금의 대중화를 선도했던 연주자 강은일 씨가 2003년에 발표했던 첫 앨범 타이틀도 '오래된 미래'였다. 이 말이 처음 사용된 건 1975년에 출간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저서 에서이다. 우리는 온갖 문명의 혜택과 합리주의의 유산에 둘러싸여 풍요롭고 진보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 행복의 추구라는 인류의 소망에서 왠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자신을 현실에서 발견한다. 이 책은 인도의 오래된 공동체가 간직해 온 삶의 모습을 통해 진정 인간에게 중요한 가치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숙연히 자문하게 만든다.
오래된 것들은 아주 예전부터 우리들 곁에 있던 것이다. 우리는 단지 역사의 주류가 된 일부의 유산들만 유효한 것으로 규정하고 나머지는 필요 없는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박제시켜 버렸다. 그 속엔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통찰해 온 탁월한 시선이 담겨 있지만 어느새 그 소중함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멀게 되었다.
지난 2007년 독일 카셀에서 열렸던 세계적 미술 축제 '도큐멘타 12'에서는 숨 가쁘게 앞으로만 치닫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오래되거나 관심에서 소외되었던 것들을 재인식하려는 의미 있는 노력이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더불어 세계 미술계를 선도해 온 도큐멘타는 5년을 주기로 열리며 그동안 주로 영상, 미디어 아트 등 가장 실험적인 양식들을 적극 소개해 왔었다. 하지만 '도큐멘타 12'에서는 전시장 곳곳에 오늘날 각광받는 작가들 작품 사이로 시대와 배경의 차이란 고정관념만 버리면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고대의 유물이나 수십 년 전엔 고립된 세상이었던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기도 하고, 미술이 권력이 되어버리기 전, 격동의 현대사 속에 짧게 명멸하고 말았지만 이제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 움직임들을 다시금 현재로 불러들여 그 의미를 차분히 되짚고 있었다. 이런 자세를 대변하듯 모든 전시 안내물은 단색의 필기체 문구로만 간결하게 표시되었다. 이후 세계 주요 전시 기관에서는 옛것 속에서 현대와의 연관성을 찾거나 현대의 결핍된 가치를 고전에서 찾아 비전으로 제시하려는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차츰 우리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니 점점 많은 사람이 가까운 곳, 아니 원래 있었던 것 속에 담긴 소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두희/우양미술관 큐레이터 fly2koko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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