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구(尹炳求)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일찍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구한말 미국인 교사(헐버트)와의 인연으로 하와이로 이주해 1903년 신민회(新民會)를 결성, 한인사회 친목과 단결을 도모했다. 1904년엔 하와이 이주 한인들에 대한 불법적인 인민세 징수 반대 투쟁으로 한인 권익보호에 앞장섰고, 1905년엔 '에와친목회'를 발족해 일화(日貨)배척 활동 항일운동을 펼쳤다.
러일 전쟁 후 1905년 미국 포츠머스 강화회의에서 조선 지배 강화를 노리는 일본에 맞서 이승만과 함께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조선독립 청원서를 전달하는 등 국권수호 외교활동을 벌였다. 1907년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침략야욕을 폭로했고, 미국 내 한국 독립 지지 여론 조성에 나섰다. 뒷날 미주 한인단체 통합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결성되고 1912년 오늘 중앙총회 대표회 개최 때는 하와이 대표로 참석, 중앙총회장이 됐다.
3'1운동 이후 필라델피아 한인연합대회에서도 연합국 강화회의 임시정부 대표로 지명됐고, 미일 전쟁 때엔 그의 아들 등 한인 젊은이들이 미국에 자원입대(1944년 12월까지 195명 입대)했다. 광복을 앞두고 이승만(李承晩)을 도와 선전 외교활동을 폈고 1949년 46년 만에 귀국, 한미협약 초안 작성에 몰두하다 그해 6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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