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 항문외과 전문의 명성 동문들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와

입력 2013-11-04 07:11:31

동창회 설립 주역 故 오창열 씨

1985년 7월 1일 열린
1985년 7월 1일 열린 '재미동문 모국방문' 행사를 마친 뒤 단체사진을 찍은 오창열(왼쪽에서 다섯 번째).

오창열은 1952년 경북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3년간 군의관 복무를 마친 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뉴욕 마운트사이나이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를 시작했다. 훗날 그는 대장항문외과 전문의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오창열은 초창기 미국으로 건너간 경북대 의대 동창들 사이에 이미 신화적인 존재였다. 동창들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도왔다.

레지던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동창들을 불러보아 저녁식사와 술을 대접했다. 아무리 밤늦게 잠들어도 새벽같이 출근해 오전 8시부터 회진을 돌았고, 토론할 때면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비록 너무 피곤한 나머지 꾸벅꾸벅 졸더라도 가장 앞줄을 지켰다. 성실함에 놀란 그곳 의사들은 그에게 책임 레지던트를 맡겼다.

1964년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워낙 성실하게 수술을 잘해서 그곳 부유층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날렸다. 한 유태인 부자가 퇴원 후 그를 찾아왔다. 아내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내서 고맙다며 찾아와서는 "무엇이든 좋으니 소원을 말해달라"고 했다.

오창열은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억지로 권유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뉴욕 한 백화점에 가게 됐다. 보석판매점 앞에 선 유태인 부자는 냉큼 5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넸다. 당시 보석 시장은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반지가 있다고 한사코 거절해도 눈앞에 들이밀었다. 하지만 오창열은 단호했다. "수술 기구는 병원에 있고, 입고 지낼 옷이 있고, 아내가 밥도 해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며 거부했다. 결국 그 유태인은 선물을 전해주지도 못했다.

레지던트를 마친 오창열은 응급실 수술실장을 맡았고, 몇 년 뒤 응급실장을 하게 됐다. 뛰어난 수술실력 덕분이었다. 항문외과 전문의로서 그는 전 세계 해부학 교과서를 바꾼 인물이기도 하다. 남성과 여성의 항문 구조에 기본적으로 해부학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수술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해부학을 전공한 사람도 깜짝 놀란 내용이었다. 결국 그의 논문 이후로 해부학 책이 바뀌게 됐다고 한다.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경북대 의대 동문들은 누구나 오창열에 대한 에피소드 한두 가지씩 갖고 있을 정도로 그는 동창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낯선 땅에 도착해 당황스럽기 그지없을 때 그는 자리 잡고 정착하는 것부터 먹고 자는 일까지 챙겼다. 주말에 혼자 숙소에 있다고 하면 차에 태워 집에 데려가 저녁을 먹인 뒤 숙소까지 태워줬다.

뉴욕의 물가를 생각하면 레지던트 월급을 받아서 자기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하던 시절이었다. 비록 진수성찬은 아닐지라도 정성껏 끓여낸 국 한 그릇 받아들고 누구나 눈물겹게 감사했다. 아내에게 연락도 없이 동문 서너 명을 이끌고 저녁에 집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집에 남아있는 돈이라고는 고작 몇 달러 뿐이었을 만큼 힘들었지만 아내는 싫은 내색 한 번 않고 남아있는 식재료로 정성껏 식사를 준비했다.

오창열은 약 15년 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고, 현재 미망인 김금환 씨 뉴저지에 살고 있다. 오창열의 아들(존 오)은 현재 라스베이거스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활약 중이다. 경북대 의과대학 재미동창회는 오창열의 동문 사랑을 잊지 못하고 매년 동창회에 맞춰 '오창열 추모 장학 골프대회'를 열며, 거기서 생긴 수익금을 장학기금에 보태고 있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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