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자금…고국에 사람 보내거나 편지로 요청

입력 2013-09-21 08:00:00

친일부호 상대 강도 행각 벌이기도

나석주 열사가 중국 망명길에 나선 것은 1920년, 일경의 추적을 피해서였다. 3'1운동이 나던 해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의 집에 강도가 들었다. 강도들은 최 부자에게 자신들이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러 왔다고 했다. 최 부자는 복면을 한 나석주를 알아보고 부친의 안부를 물은 뒤 금고에서 630원이란 당시로선 거액을 꺼내 주었다. 나석주 일행은 떠나면서 최 부자에게 강도를 당했다고 신고하라고 했다. 나중 사실이 드러나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였다. 독립자금 모금활동에 대한 일경의 추적은 결국 그에게 망명을 선택하게 했다.

임시정부를 비롯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엇보다 자금이 절실했다. 가산을 정리해 들고 온 돈은 얼마 안 가 바닥이 났다. 고국에 사람이나 편지를 보내 자금을 요청했고 민주에서는 동포들에게 거두기도 했다. 심산은 아예 직접 모금활동에 나섰다. 심지어는 친일부호들을 상대로 강도를 벌인 예도 있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른 이도 적지 않다.

독립자금 일화 중 하와이 교민들이 세금 내듯 월급의 일부를 떼어 독립운동 단체에 기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백범일지에는 이봉창 의사에게 건넨 활동비 대부분을 하와이 교민들의 지원금으로 충당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한국의 최초 무역회사인 백산상회를 운영한 백산 안희제와 학봉 김성일 집안 13대 종손 김용환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백범이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자금 6할이 백산의 손을 통해 나왔다"고 할 만큼 백산은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큰 몫을 했다. 경주 최부자 집 최준은 여러 차례 백산을 통해 독립자금을 보냈다 그러면서 절반이라도 건네지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광복후 최준이 백범을 만나 확인해보니 자신이 보낸 돈과 받은 돈이 한 푼도 차이가 없었다. 감격한 최준이 백산의 무덤을 향해 대성통곡했다는 일화가 있다.

김용환은 살아생전 파락호였다. 집안 대대로 물려오던 전답을 노름으로 탕진했다. 무남독녀 외동딸의 시집에서 장롱을 사오라며 준 돈마저 챙겨간 비정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해방 이듬해 그가 죽고 난 후 밝혀진 진실은 충격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재산 전부를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낸 것이었다. 죽기 전 사정을 아는 친구가 사실을 밝히라고 했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문 채 세상을 떠났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기꺼이 감수한 것이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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