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구성진 가락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서정적인 가사, 아리랑은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을 대표하는 노래다. 아리랑 없는 고장은 없다. 60여 종 3천600여 수의 아리랑이 전한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아리랑이 처음으로 채록된 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이다. 구한말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박사가 1896년 문경새재아리랑을 서양식 악보에 옮겨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 월간지 '더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에 실었다. 그는 영문으로 'Ararung ararung'이라 쓰고 한글로 '아르랑 아르랑'이라 부기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라 하고 다른 노래들은 반찬이라고 했다.
헐버트는 구한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미국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자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들어가 이의 불법성과 무효를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미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택했다. 그는 뉴욕 타임스 기고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식으로 조약을 맺은 친구의 나라 조선을 배신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훗날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루스벨트가 을사늑약 직후 고종황제의 도움 요청을 거절해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의 친일 정책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폭로했다. 그가 1905년 쓴 한국사 1권에서는 '대마도가 신라의 속국이었다'는 기록도 남겼다. 1907년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고종에게 건의했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그를 추방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탐욕과 야만을 고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1949년 86세의 나이로 다시 한국땅을 밟았지만 오랜 배 여행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숨졌다.
헐버트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의 묘지명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적혀 있다.
어제 헐버트의 아리랑 악보가 새겨진 비석이 문경새재에 세워졌다. 이 자리엔 헐버트의 증손 킴벌 헐버트가 참석해 명예 문경시민이 됐다. 내일은 8·15 광복절이다. 자신의 조국 미국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미국인, 한국인보다 더 일제에 맞섰던 박사를 기리기엔 그 무엇으로도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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