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우리는 원하는 사실만 선택한다

입력 2013-07-04 11:31:38

"대개 역사가는 자기가 원하는 종류의 사실을 건져 올리게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가 역사의 '해석'에서 저질러질 수 있는 '편향'을 경계한 말이다. 역사가는 해석에서 중립적이려고 노력해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관이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해석'의 원료인 '사실'의 선택도 말 그대로 '선택적'이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이 같은 '편향'에의 유혹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더욱 기승을 부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느냐 여부를 둘러싼 여야의 설전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민주당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어디에 '포기'란 말이 있느냐고 목청을 높인다. 축자적(逐字的) 해석의 전형이다. 반면 여당은 회의록 전체 맥락으로 봤을 때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한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진실은 하나인데 해석은 둘이다. 앞으로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남북정상회담 원본 자료가 국정원이 공개한 회의록과 차이가 없다면 '원본'이 공개돼도 해석은 평행선을 달릴 것이다. 과연 어느 해석이 맞는가. 민주당의 주장대로 회의록에는 '포기'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NLL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는 널려 있다. 노 전 대통령은 NLL은 "괴물"이며 "바꿔야 한다"고 했다.

NLL이 과연 '괴물'인가? 역사를 살펴보자. NLL은 7'27 정전 협정문에 포함된 지도 위에 표시되지는 않았지만 확정 후 유엔군 사령부가 북한 측에 정식 통보했고 북한과 중국 측은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더구나 NLL은 휴전협정 당시 북한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그어졌다. 연세대 김명섭 교수에 따르면 휴전협정에서 육상에서는 '소유한 대로 소유한다'는 원칙이 적용됐지만 해상의 휴전선에는 일부 지역은 '소유한 대로 소유한다'는 원칙, 다른 지역은 '전쟁 전 상황'으로의 복귀라는 북한의 주장이 적용됐다. 그 결과 1950년 6월 24일 대한민국이 통제하고 있었지만 정전협정 당시에는 북한이 차지하고 있었던 옹진반도 인근의 기린도, 선위도 등 38도 선 이남에 위치한 도서들은 북한 측에 양도됐다. 이렇게 획정된 NLL이 과연 괴물인가.

'바꿔야 한다'는 표현도 그렇다. 바꾼다는 것은 현재 상태가 불합리하거나 비정상적이라는 판단을 전제로 한다. 과연 NLL이 그런가. 노 전 대통령은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을 했다. "국제법적으로 논리적 근거가 분명하지 않고"라는 발언이다. NLL은 전쟁 당사자들 간의 '사실상의' 합의로 그어졌다. 북한은 1973년 10월부터 두 달간 NLL을 40여 회 이상 침범한 이른바 '서해 사태' 때까지 NLL에 대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은 북한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전체적 맥락에서 "NLL은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뜻이며 "NLL을 서해평화협력지대로 만들기 위한 설득이었고 노력"이라고 반박한다. 회의록에는 NLL이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발언이 나온다. "NLL을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뜻"이란 민주당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한 말이다. 하지만 그가 NLL의 현실적으로 강력한 힘을 인정한 것은 국제법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한에서)NLL 말만 나오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NLL을 서해평화협력지대로 만들려는 것이었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서해의 평화가 문제라면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단호히 대처해야지 NLL 무력화로 이어질 수 있는 김정일의 '공동어로구역'이나 '평화수역'을 만들 일이 아니다.

회의록에는 노 전 대통령의 NLL 수호 의지로 읽힐 수 있는 대목도 있다. "NLL을 가지고 이걸 바꾼다 어쩐다가 아니고 그건 예전 기본 합의서 연장선에서 협의해 나가기로 하고"라는 발언이다. 하지만 "이것(서해평화협력지대)이 NLL보다 강력한 것"이라는 발언에 이르면 그의 'NLL 수호 의지'는 다시 의심의 무대 위로 올려진다. 결국 NLL에 대한 노 전 대통령의 발언들을 요약하자면 이런 것이 될 듯하다. 'NLL을 바꾸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안 되니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의미일까. 'NLL 포기'인가 'NLL 지키기'인가. 독자들께서는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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