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의 동양고전 이야기] '잡가'(雜家) 이야기-여씨춘추(呂氏春秋)

입력 2013-06-29 08:00:00

'잡가'라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중국 고대 전국시대(BC 403~221) 말기 제자백가가 서로 영향을 주어 섞이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당시 지금의 산동성에 있던 제(齊)나라의 위왕(威王)이 수도 임치의 궁성 남문, 즉 직문(稷門) 가까이에 연구소를 짓고 천하의 많은 학자들을 초빙하였다. 다음 왕 선왕(宣王) 때에는 더욱 이 연구소를 확대하여 학자들을 초빙하였는데, 이들은 정치적 직분은 없이 오로지 학문 연구와 토론에만 전념하도록 시혜를 베풀었다. 이들을 '직하(稷下)의 학사(學士)'라고 불렀다.

그 다음 왕 양왕(襄王) 때에는 순자(荀子)도 이곳을 방문하여 연구소 소장 직위에 있으면서 여러 학파의 학설을 참고하였다. 그래서 순자의 학설은 당시 직하학의 대세를 이루었던 도가 사상에 대항하여 나온 유가 옹호 학설의 성격이 짙은 것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장자는 하늘(자연)에 가리어 인간(도덕)을 모른다"라고 한 바 있다('해폐편').

이와 반대로 법가의 입장에서는 도가에 접근한 경우가 많다(한비자의 '해로편' '유로편'). 반대로 도가가 법가에 접근한 경우도 있다. 이처럼 전국 말기에는 제자백가 사이에 교류가 왕성해져 소위 '잡가'라는 것이 생겼다. 그 전형적인 예로서 '관자'(管子)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춘추시대(BC 770~403) 정치가로 알려진 관중(管仲'BC ?~645)의 저서라고 하는데, 전국 말 법가계 학자들의 논의를 모은 것이다. 그 주내용은 물론 법가가 주류이나 유가나 도가의 요소도 많이 섞여 있어 잡가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잡가의 대표적인 저술은 역시 '여씨춘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의 재상이었던 여불위(呂不韋'BC ?~235)가 문하에서 길렀던 식객(食客:자문역)으로 길렀던 학자들의 논문을 편집한 것이다. 당시 식객이 3천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 유'묵'도'법 및 기타 제가의 학설이 망라되어 있어 잡가의 책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기 자기 학설을 유지하기보다 절충적 성격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 어리석은 사람을 부릴 때는 상벌(賞罰)로 다루고, 현명한 사람을 부릴 때는 의(義)로써 한다"(知分篇)라는 말은 현명한 사람은 유가의 도덕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법가의 상벌로써 대하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여러 학설을 모아 놓은 것이 분명하지만, 큰 비중은 도가 사상이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할 때는 법가사상으로 하였지만, '여씨춘추'는 그보다 훨씬 전에 이루어졌으므로 이상할 것은 없다. 또 노자와 장자 사상을 인용하는 의도도 원래 그 사상과는 멀리 떨어진, 군주 절대 권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계명대 윤리학과 교수 dhl333@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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