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술을 마시는 이유와 술을 대하는 방식

입력 2013-06-24 08:42:01

문득 술을 마시는 데에 하찮더라도 어떤 의미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익숙해져 버린 음주패턴 때문일 수도, 정리되지 않는 복잡함으로 인해 하루를 빨리 마무리해버리고 싶다는 유혹 때문일 수도, 아니면 하루를 잘 마감했기에 오늘을 정리하고 위로하는 마음에 술을 한잔 하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들.

몇 해 전부터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면 감당키 어려운 상태가 되곤 한다. 몸이 이전에 비해 숙취를 이겨내는 힘이 줄어들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불쾌하고 괴로운 '감정의 숙취'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감정의 숙취는 상당히 괴로운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하루의 시간을 꼬박 보내야지만 빠져나올 수 있는 감정. 이 감정이 또 나를 지배할까 두려워 가능하면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선까지만 술자리를 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술 한잔을 기울이며 하루를 마감한다. 맥주나 소주 한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고,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와 술 한잔을 걸치며 철부지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도 있고, 홀로 조용히 술 한잔을 기울이며 스스로 정리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아침, 저녁으로 술을 마시며 비틀비틀 취한 상태로 지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분노를 표하거나 욕지거리를 하고 상대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술을 한잔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와 소통을 이어가고, 진전되지 않는 관계를 재생시키고, 하루의 일과를 열심히 마무리한 자들의 작은 축제이자, 좋은 감정을 증폭시키는 촉매제로서의 의미나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나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소주 한잔을 청해 반가움을 나누고, 힘겨웠지만 부지런하게 하루 일을 마친 후 동료들과 함께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스트레스를 씻어내고, 사랑하는 연인과 와인 한잔을 기울이며 행복함을 주고받고, 잔잔한 음악과 위스키 한 모금에 홀로 기적을 느끼고, 탄산 가득한 샴페인 한잔으로 행복한 웃음을 짓는 순간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여 하루를 중지해버리고 싶어 마시는 술 한잔, 분노에 이글거려 분노를 잠재울 요량으로 마셨건만 더욱더 분노에 끓게 만드는 술 한잔 같은 경우는 자신과 주변에 치명적인 불쾌감과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나는 간혹 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 감정이 굉장히 크게 증폭되어지는 경험을 하곤 한다. 뭔가 알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설렘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한 경우, 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주체하지 못하는 그 감정을 나눌 상대로 사람이 아닌 술 한잔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순간에 만나는 술 한잔은 나를 아름다운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폭넓은 생각의 문이 열리도록 해준다.

하지만 반대로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고 정신적으로 무리가 되어진 상태에서 찾게 되는 술은 투명한 물이 담긴 컵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머리를 혼탁하게 하고 아픈 마음을 더욱더 얼룩지게 하여 불안한 마음을 극대화시킨다. 우리의 술 문화에 대한 우려는 이전부터 항상 있어왔다. 대학교 신입생들에게 신고식이라는 말로 무리하게 권하는 술 문화, 살아남기 위해 억지로 마시는 직장인들의 밤술 문화,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대의 주량에 맞춰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마셔야 하는 술 문화.

가끔 일 때문에 일본에 가면 한국인과 술 한잔 기울인 경험이 있는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은 술이 세다'라고 말한다. 사실 술이 센 것이 아니라 술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 세 보이는 것뿐인데. 한국인이 체질적으로 술에 강한 몸뚱아리도 아니지 않은가?

천천히 우리의 술 문화도 바뀌어가는 분위기다. 이제 좀 제정신으로 살아도 될 만한 시기가 된 것인지, 아니면 술로써 해결되어지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술 한잔을 한다는 것은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슬픔을 위로하고 사람과 사람을 마음으로 연결해주는 촉매의 끈이다. 이 정도의 작용을 넘어서 버린 감정의 요구를 받아줄 세상의 어떤 술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다.

양익준/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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