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소리보다 좋던 "지글지글"…유학도 관뒀죠
멋있는 트롬보니스트와 주방에서 땀을 흘리는 요리사. 둘 중 하나의 운명을 골라야 한다면? 이상헌(37) 씨는 주저없이 요리사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트롬보니스트가 되기 위해 독일에 유학갔던 이 씨는 그곳에서 요리와 사랑에 빠져 요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트롬본 소리보다 지글거리는 음식 소리가 더 듣기 좋아요."
낯선 악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악기 트롬본. 이 씨는 묵직한 바리톤 음역의 브라스악기 트롬보니스트다. 그러나 이 씨는 트롬보니스트보다 '셰프'라 불리길 원한다. 그 역시 직업을 물으면 당당하게 '셰프'라고 말한다. 요리하는 것이 편안하고 즐겁다고 했다. "나도 행복하고, 주위 사람들도 행복하면 좋은 것 아닌가요. 요리하는 것이 천직인가 봐요."
이 씨는 대구 북구 동천동에서 이태리 가정식백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매일 피자를 굽고 파스타'리소토를 만들고 커피를 내린다. "힘은 들지만 즐겁고 재미있어요. 내가 요리한 것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행복합니다. 가끔 트롬본이 생각나지만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레스토랑을 운영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단골이 생기고 찾아오는 손님도 늘고 있다. 특히 30, 40대 주부들과 가족들이 많이 찾는다. 그는 "음식을 만들고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는 것이 적성에도 맞다"고 했다.
이 씨는 음악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음악에 눈을 떴다. 고교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밴드부에 가입해 트롬본을 불었다. 실력도 출중해 지역 대학에서 주최한 음악콩쿠르에 출전해 좋은 성적으로 입상했다. 계명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데트몰트시에 있는 음악전문대학에서 1년 6개월 정도 공부했다. 원했던 유학이었던 만큼 즐겁게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이 그리웠다. 부모님도 보고 싶고 함께 공부했던 오보에 연주자 여자친구도 보고 싶었다. 한국 음식도 먹고 싶었다. 결국 향수병에 걸렸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요리였어요. 제가 요리를 잘했거든요. 주위 사람을 불러 음식을 대접했더니 모두 '맛있다'며 칭찬을 하는 거예요. 한두 번 들으니 '정말 내가 요리를 잘 하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요리사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어요."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어요. 여자친구와 의논 끝에 결론을 내리고 부모님 승낙까지 받았어요."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바로 귀국했다. 호텔외식조리학과에 들어갔다. 1년 만에 한식을 비롯해 양식, 중식, 제과, 제빵 등 5개 자격증을 땄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니 공부도 잘되고 속도가 붙더라고요. 재미있게 자격증을 땄어요."
경주에 있는 호텔에서 일하다 결혼을 했다. 대구에서 출퇴근이 힘들어 직장을 대구로 옮겼다. "거기서 프랑스 셰프로부터 이태리 요리를 배웠어요. 요리를 하나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개업했다. '이태리 가정식백반'이란 이름은 평소 알고 지내던 개그맨 전유성 씨가 지어줬다. "이태리 요리 중 가정식백반은 없어요. '이태리 가정식백반은 세상에 없다. 네가 하면 된다'는 거예요. 전유성 씨다운 발상이죠."
파스타와 피자에 한식을 접목했다. 매콤한 고추장과 누룽지 등을 가미해 한국인의 입맛에 맞췄다. "아직 평가하기 이르지만 반응은 좋아요. 계속 개발 중이니까 조만간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 겁니다."
아내(경북도립교향악단 단원)와 아이들도 이 씨가 만든 요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딸아이는 '아빠가 만든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한단다. 부모님 역시 아들이 만든 음식이 최고라며 자주 찾는다고 했다.
"이렇게 맛있다고 하니 직업을 바꾸길 잘했나 봐요. 응원군을 밑천으로 삼아 맛있는 요리를 개발할 겁니다."
그동안 공부했던 트롬본이 아깝지 않냐고 물으니 "트롬본은 기회가 있으면 또 연주하면 되니까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주가 끝나고 박수를 받는 연주자를 볼 때면 부럽기도 하다며 말끝을 흐린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주자를 보면 솔직히 부럽습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이 씨는 그러나 후회는 없다고 했다. "지금 일에 만족합니다. 적성에도 맞고요."
요리에 대해 물었다. "요리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도전해야 하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똑 부러지는 대답이 나왔다. 이 씨는 요리가 재미있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으면 뿌듯하단다.
'모든 사람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요리'가 있느냐고 묻자 이 씨가 딱 맞는 대답을 내놓았다.
"진심이 담긴 요리요. 사람들 입맛이 각자 다르고, 까다로워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어요.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담긴 진심은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다고 믿어요.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알아주세요. 진심을 다해 만들었으니까요. 최고의 비결이죠." 천생 요리사이다.
사진'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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