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과대 학생들 시체 데모 '10월 사건' 도화선
해방을 맞았지만 민중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한데다 수해로 곡물 수확량이 급격히 줄었고, 콜레라까지 창궐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속출했다. 대구경북에도 귀환동포 30여만 명이 흘러들면서 쌀 수요는 늘었고, 일부 약삭빠른 장사치들의 사재기까지 기승을 부린 탓에 쌀값은 일제 강점기 때보다 10배 이상 치솟았다.
1946년 11월 15일 자료에 따르면, 경북의 실업자는 약 20만 명으로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절반이 넘는 56.5%에 달했다. 절도 등 치안범죄는 해방 후부터 1946년 4월 30일까지 1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해방 이전보다 6배나 늘었다.
◆미군정 식량정책 실패가 원인
콜레라로 지역에서 수천 명의 환자가 발생하자 미군정은 치료를 위한 적절한 조치도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렸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경계를 넘을 수 없었다. 쌀을 비롯한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졌다. 돈이 있어도 쌀을 구할 수 없다 보니 콜레라를 치료하는 의사들조차도 콩나물과 쌀로 죽을 끓여 먹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미군정은 일제강점기의 한국인 관리과 경찰 대부분을 그대로 등용했다. 경북도와 대구부의 국과장급 대다수는 일제 관료 출신이었다. 일제 말기 경북도 경찰관 2천100명 중 873명이 한국인이었는데 이들 대부분 미군정에 다시 임용됐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경찰관들이 자신들의 쌀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공출해가는 것을 보며 농민들의 분노는 커졌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1946년 9월부터 대구 시민들은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지역 노동자들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9월 총파업에 맞춰 파업에 돌입했다. 10월 1일 오전 노동자 500여 명은 대구역과 대구공회당(현 대구시민회관) 인근에서 시위를 벌였고, 시민 1천여 명도 대구부청(현 대구시의회 건물) 앞에서 식량문제를 해결하라며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이날 저녁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민간인 2명이 숨지게 됐다.
◆경북에서만 77만여 명 시위 참여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튿날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로 몰려가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투석전이 벌어졌고, 경찰도 군중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군중은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빼앗은 뒤 시내 곳곳에 있는 경찰주재소를 점령하고, 쌀 사재기를 저지른 부잣집이나 친일파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빼앗아 시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날 시위과정에서 18명(또는 17명)의 시민이 경찰 총격으로 숨졌고, 경찰관 4명도 시민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 4대를 앞세워 시내로 진입한 뒤 미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시위는 경산'성주'영천 등지로 확대됐고, 경북 일대에서 민중과 미군정 간의 충돌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당시 경북에서만 전체 인구의 25% 정도인 77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남한 전체로 볼 때 230만 명이 참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미군정은 사망 20명, 중상 50명, 행방불명 30명이라고 밝혔지만 대구'경북에서만 사망자 136명이 발생했고, 7천500여 명이 폭동 혐의로 검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사상자의 숫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의과대학 학생들도 시위에 나서
2000년 발행된 '경북대학교 병원사'는 '10'1사건'으로 표기하고, 한쪽 분량으로 이때 사건을 언급했다. '10월 2일 시민들은 시내 곳곳에 모여 시위를 하여 기세를 올리면서 대구역 앞으로 집결했는데, 경찰과의 충돌이 일어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흰 가운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람들에 의해 시체 한 구가 옮겨져 와 경찰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고 함에 따라 군중은 흥분하여 수많은 군중이 이를 메고 제19구경찰서로(현재 중부경찰서) 행진해 경찰서를 포위했다.'
아울러 덧붙이는 말로 '현재 확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들이(흰 가운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람들) 대구의과대학 학생들로서 실험실 시체를 가지고 나왔다는 증거 불명의 전언도 있고, 정체불명의 다른 사람이 대구의과대학생을 사칭했다는 설도 있다'라고 적어놓았다.
한편 경찰청과거사위 보고서(2006년)에는 사건 원인에 대해 '근원적으로는 미군정의 식량정책의 실패, 좌익의 세 확장 운동과 노조총파업 집회, 경찰의 발포 등이 도화선이 됐고, 10월 2일 대구의전 학생들의 시체 데모가 사건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인 이름도 등장한다. '최무학 등 대구의과대학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학생시위대는 시신 한 구를 들것에 메고 전날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사람의 것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면서 대구경찰서로 갔다.'
미 24군단 사령부 감찰참모실 보고서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2(사망자 중 한 명)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고 신원 미상이다. #2의 시신을 병원으로 가져와 영안실에 안치했을 때 최무학이라는 의대생이 이 시신을 들고 의대에서 수업하는 학생들 앞에서 행진했다. 그리고 최무학은 학생들과 무리를 지어 대구 거리를 행진하면서 시민들에게 시신을 내보이고 '이것이 아무 죄 없이 경찰에 총 맞아 죽은 노동자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병원에는 이 시신을 누가 병원으로 가져왔는지, 시신이 10월 1일 몇 시에 도착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전혀 없다.'
시위에 참여했던 대구의과대학생들도 많이 연행됐다. 이들 중 일부는 퇴학 처분을 받아 좌익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행방불명이 됐지만, 당시 정황으로 보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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