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스위스 은행

입력 2013-06-01 08:00:00

은행 비밀 계좌의 원조라면 단연 스위스다. 그만큼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의 역사는 오래됐다. 올해로 300년을 훌쩍 넘겼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프랑스의 왕들에서 시작됐다. 금품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고, 언제라도 찾을 수 있으며, 철저한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곳으로 프랑스 왕들은 스위스 은행을 택했다. 1713년 은행이 밀집해 있던 스위스 제네바 시의회는 은행들이 어느 누구에게도 고객 정보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입법해 보조를 맞췄다. 이때부터 부유층의 조세 피난처로, 독재자나 범죄자의 검은돈 은닉처가 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1930년대 미국 시카고의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조세 포탈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조직 자금을 옮겨간 곳도 스위스의 비밀 계좌였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는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외환을 소유한 자국민을 발각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법을 만들었다. 게슈타포들은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에 눈독을 들였다. 독일의 침공을 우려하면서도 스위스는 연방법으로 고객 비밀을 더욱 지키도록 해 빗장을 걸었다.

철저한 비밀 보장과 자금 출처를 묻지 않는 관행은 돈이 스위스로 몰려들게 했다. 검은돈의 천국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검은돈이 동시에 인출되면 스위스 은행들이 망할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명분이 됐다.

세상이 변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도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나라들이 조세 회피처로 빠져나간 자금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다. 2009년 스위스 최대 은행 UBS는 세금 회피처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고 미국 고객 4천450명의 명단과 7억 8천만 달러의 합의금을 건넸다. 비밀주의의 빗장이 풀린 것이다. 미국은 지금 스위스 3위 은행 '줄리우스 베르'에 대해서도 미국인 고객 자료를 넘기라고 닦달하고 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 관행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스위스 UBS은행 홍콩 지점으로 돈을 빼돌린 정황이 드러나 검찰이 수사 중이다. 이 회장은 UBS로 자금을 빼돌려 일본 부동산 매입을 위한 차명 법인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한국 정부가 스위스 은행에 한국인 비밀 계좌 소유자 명단 공개를 요구한다면 스위스가 들어줄까.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미국엔 안 통하지만 한국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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