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 세상 별난 인생] 책 배달 산타클로스 이승준 씨

입력 2013-05-30 14:17:58

빨간색 옷 입고 책 썰매 "난 이동식 서점 CEO"

핀란드 로바니에미(Rovaniemi)의 한적한 숲에 산타클로스가 사는 '산타 마을'(Santa village)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산타클로스에게 보내는 우편물은 이곳으로 배달된다. 산타 마을의 우체국은 전 세계 어린이들이 보내온 편지로 가득하다. 산타클로스의 사무실에서 세계 12개 국어를 구사하는 산타클로스 비서들이 답장해준다. 산타클로스 고향은 핀란드이지만, '북(Book) 클로스'는 대한민국 대구에 산다.

◆초여름에 '북 클로스'가 떴다

빨간색 상'하의, 빨간 카우보이 모자, 빨간 스카프…. 온통 빨간색 복장을 한 사람이 '책 썰매'(이동식 책장)를 끌며 대구 도심을 누비고 있어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북 클로스' 대표 이승준(44) 씨이다.

대구 중구 동성로에서 이 씨를 만나 '길거리 취재'를 했다. 취재하는 동안 이색 복장을 한 그의 모습에 행인들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길 가던 조상일(64'달서구 이곡동) 씨가 책 수레에 널린 책에 관심을 보이자 '인생은 말하는 대로 된다'는 책을 권해준다. 조 씨는 "교육공무원으로 도서관에 근무하다 퇴임했다. 책에 관심이 많다"며 흔쾌히 책 한 권을 샀다. 이 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아서 큰 일"이라며 "오히려 연세가 지긋하신 중'장년층이 훨씬 더 책을 사랑한다"고 한다. '북 클로스'답게 책에 대한 주관이 뚜렷하다. "책이라고 다 좋은 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논리로 된 책을 읽으면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며 책 선택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자신이 내용을 잘 모르는 책을 팔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한때 잘나가던 대기업 사원

이 씨는 경북 영덕이 고향이다. 포항고등학교와 경북대 무역학과를 졸업, 1997년 대기업(현대전자)에 입사했다. 서울 본사 업무부에 근무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주식투자에 빠져들었다. 200만원으로 시작한 주식투자가 3년 만에 10억원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 사태가 닥쳤고 현대전자는 하이닉스로 합병됐다. 회사가 어수선한데다 주식에 성공한 경험이 있어 '회사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본격적으로 주식에 승부를 걸 것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갓 서른의 총각 시절이라 세상살이가 만만해 보였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주식에 전념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험난했다. 한꺼번에 큰돈을 벌자는 욕심에 장외주식에 모든 자금을 쏟아부었다. 이른바 '몰빵'이었다.

한 달 만에 투자금을 모두 날렸다. 게다가 4억원의 빚을 지게 됐다. 그는 "주식으로 늘린 자산은 운이 좋았을 뿐인데, 그때는 마치 제가 잘나서 번 돈으로 착각했다"고 고백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고깃집의 불판을 닦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2003년 경북대학교 북문에 '아수라장'이란 작은 분식점을 열었다. 친구의 소개로 참한 여성(김영희 씨)을 만나 그해 말 결혼식도 올렸다. 현재 두 딸이 있다.

그는 낮에는 보험영업, 전기보일러 판매원, 댄스바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고생한 끝에 생활이 점차 안정돼 갔다. 그러다가 어릴 적 책벌레였던 생각을 되살렸다. 남문시장 옆 코스모스서점에 점원으로 취업했다, 1년 6개월 동안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때 '총각네 야채가게'라는 책을 만났다. 찾아다니는 서비스로 성공신화를 일군 세일즈맨의 수기였다. 그 책을 읽은 후 '야채장수의 방문판매 방식을 책 판매에 접목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책 썰매로 씽씽 달려요

2012년 5월 17일. 마흔 세 살 생일. 그는 책 수레를 끌고 다니며 책을 판매하는 '이동식 서점'을 창업했다. '책 산타'라는 이름으로 시중보다 10~20% 싸게 판매했다. 상가와 사무실을 방문하고 신천변과 팔공산 갓바위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 길거리 책방을 하면서 수시로 단속반과 실랑이를 벌였다.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덕산동 YMCA 옆 동남필방 사장님이 자신의 가게 앞에서 장사를 하도록 허락했다. 요즘엔 책 수레를 오토바이에 매달아 5일 장터에도 간다. 이름도 '북 클로스'로 바꿨다. 장구도 싣고 다니며 가끔'딩~가~딩' 연주를 한다. 시끌벅적한 시장터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엔 최고다.

북 클로스 생활 1년째. 책을 팔아 얻는 수입은 적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도 꽤 생겼다. 요즘은 강연 요청도 심심찮게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학부모들에게 '올바른 책을 선택하는 법'을 전한다. 지난 3월엔 대구시 종합복지회관에서 네 차례나 인문학 강연을 했다. "저는 책 읽는 세상을 만드는 이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돈은 잘 벌지 못하지만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책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희망'이라는 선물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강조한다.

사진'박노익 선임기자 noi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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