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의 줌인] 전수일의 '콘돌은 날아간다'

입력 2013-05-30 07:55:18

죄와 용서…파계한 사제, 구원 받을까

한국 영화계에서 전수일은 이방인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뒤 부산에서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 물론 이런 짧은 문장이 그(와 그의 영화 세계)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정이 아니라 질문을 해보자. 왜 그는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한 것일까? 왜 그는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전수일과 그의 영화를 규정할 때 이 두 요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처음부터 할리우드식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할리우드류의 영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충무로와도 굳건하게 결별한 채 고독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수일의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이전의 한국 영화와는 다른 세계를 꾸준히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는 상처 입은 인간의 내면적 고통이 떠돌이 삶을 통해 표현된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면서 상처를 치유하려 하지만, 치유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아예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한 치유를 위해 인물이 떠돌며 고뇌하니, 영화는 어둡고 쓸쓸한 풍경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전수일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종교적 삶을 떠올리게 된다. 상처와 치유를 위한 구원의 갈망이 그의 영화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구원은 살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전수일의 영화는 인간의 죄와 구원의 불가능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영화를 불러오게 만든다. 물론 이 감독들처럼 추상으로 가득 차지는 않고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간의 한계와 고뇌에서 벗어나려 한 몸부림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전수일은 풍경 속에 갇혀 떠도는 인물의 삶을 언제나 느린 카메라로 담아낸다. 때로는 롱테이크의 풍경 속에 인물이 놓이고, 때로는 프레임 속 프레임에 인물이 갇힌다. 그래서 영화 속 풍경을 보면 인물이 보인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전수일은 영화의 서사보다 이미지를 중시하거나, 이미지가 서사를 압도하는 영화를 만든다. 물론 서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사는 풍경과 떨어질 수 없다. 가령, 그의 영화 속 인물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대상을 응시하거나 멍하니 풍경 속에 갇혀 있다. 관객은 이 풍경을 통해 인물의 마음을 읽고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이러니 그의 영화가 비상업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전수일의 아홉 번째 장편 '콘돌은 날아간다'. 역시 과연 전수일의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느린 카메라, 핏기 없는 인물, 정적인 대사, 뚝뚝 끊기는 편집, 풍경에 갇힌 인물……. 다만 이전 작품과 차이가 있다면, 종교와 성, 죄와 용서의 문제를 구체적이면서도 심도 있게 다루려 했다는 정도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박 신부이다. 그가 아끼는 연미가 성폭행을 당해 죽는다. 그 시간 신부는 연미와 만날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연미가 죽었다는 죄책감을 갖는다. 죄책감으로 신부는 연미와 함께 살며 엄마 역할을 했던 언니를 찾아가 위로하다 그만 성관계를 맺게 된다. 연미의 유골을 뿌리고 술을 한잔하며 괴로워하다, 상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수단으로 섹스를 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연미의 살해범은 신부가 잘 알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신부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 결국 신부가 살해의 원인이 되었고 그 살해를 핑계로 파계까지 저지른 것이다. 이제 신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박 신부는 친구가 있는 페루로 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콘돌은 날아간다'도 이 때문이다. 페루로 간 신부는 친구가 깊은 산골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간다. 그러나 도중에 그는 퍽치기를 당해 돈도 빼앗기고 상처도 크게 입는다. 그가 회개하고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처럼 피를 흘리며 겨우겨우 찾아간 산골의 성당에도 아무도 없다. 이때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죽은 연미가 환생한 것 같은 어린 소녀가 나타나 그를 친구 신부에게 인도한다. 조랑말을 타고 가는 소녀의 모습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모습 같기도 하다. 피를 흘리며 겨우 친구를 만난 박 신부는 그 친구에게 고해할 것이 있다고 말한 뒤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알다시피, 페루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해방의 기념으로 그들은 콘돌을 노래한다고 한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El Condor Pasa)! 박 신부가 굳이 페루로 간 것도 그가 저지른 죄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서이다. 진실한 고해를 통해 콘돌처럼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전수일은 이것이 가능하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 이미 티베트 불교의 시원으로 다가가려 한 노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 영화에서 재증명하려는 것일까? 전수일은 인간은 결국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나약한 인간을 독특한 스타일로 그리기에 나는 전수일의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rosebud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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