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마루 끝에 서서 뜸도 채 들지 않은 밥 물 말아 후루룩 먹다가 산모롱이 돌아드는 기적소리 들리면 숟가락 내던지고 냅다 뛰었다/학교에서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수업은 3시쯤 끝났으나 통학열차는 저녁 7시가 넘어야 있었다/기다리는 내내 배가 고팠다(윤효의 시 '그리움6' 중에서)
140여 명의 문예창작영재교육원 학생이 함께한 창작캠프가 끝났다. 남원을 거쳐 섬진강, 청학동 서당으로 이어지는 남도 문학의 길이었다. 광한루 백일장에서 시작하여 송수권 시인의 특강, 그리고 저녁에 이루어진 섬진강 판소리 문화학교의 민요와 판소리 공연 모두가 아름다웠다. 특히 자신이 가르치는 중'고교생들과 함께 판소리 명창 두 분이 3시간 넘게 펼친 공연은 압권이었다. 영재원 학생들은 남도의 소리 문화를 만끽했다.
지리산의 오월은 여전히 파랐고, 섬진강의 물빛은 맑았고, 아리랑과 판소리도 구성졌지만 문득 오월이 아팠다. 아침 하늘을 보았다. 옅은 회색 구름이 온 하늘을 닫아 잠그고 있었다. 닫혀버린 문 밖에서 오랜 시간 서성거렸다. 하지만 문을 열지 않고 당신을 만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무거운 암담함과 절실한 서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멀리 이어지는 기찻길을 노을빛이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감히 다가갈 수 없어 먼발치에서만 바라보던 당신. 당신의 웃음에 몰래 웃었고, 당신의 울음에 따라가며 울었다. 그 웃음과 울음 너머로 당신이 미루나무 저녁길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곤 했다. 당신이 멀어져 간 이후, 찌그러진 골짜기 가장자리에서 나 스스로를 대면하곤 했다. 밤새 이명에 시달리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아침이 되면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여전히 바람도 불고 있고, 거기에 사람들이 있고, 여기에 말도 들렸다. 그것이 억울할 때가 많았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수많은 은행나무 새순이 자란다. 어린 새순을 파보니 아직도 은행이 매달려 있었다. 은행 옆구리를 헤집고 나온 새순이 파란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저 새순은 바로 자신의 몸뚱아리를 뚫고 나온 거로구나. 모든 생명은 상처가 만들어내는 거로구나.
상처는 대체로 기억이 남긴 흔적이다. 기억은 저장되기도 하고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삭제되기도 하면서 상처를 만든다. 삭제된다고 해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다. 수없이 슬픔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해도 쉽게 슬픔이 놓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기쁨처럼 증발하지 못하고 깊은 앙금으로 가라앉아 있기 때문일 게다.
살아오면서 누구나 많은 상처 속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내가 타인에게 준 상처보다 내가 받은 상처에 민감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자신에게 관대한 것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는 상처와 내가 받은 상처가 만들어내는 긴장, 그리고 결국 남아있는 그 수많은 굶주린 그리움들, 거기에 여전히 나의 길이 있었다.
그래도 길 위에는 여전히 내가 주워야할 진실들이 나락처럼 흩어져 있었다. 이렇게 지치고 너덜너덜해진 삶을 이끌고 살아가면서도 수혈 받으러 갈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 추억을 치료하러 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당신이 고맙다. 그리운 풍경을 남기고 그늘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혼을 내 삶에 심어주었기에.
돌아오는 길, 아이들이 모두 떠난 시골 초등학교를 개조하여 만든 섬진강 판소리 문화학교의 텅 빈 운동장에 서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 그게 전부인 세상. 도자기를 굽고 남도의 소리에 빠져서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 그대로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돌아가야 했다. 저 일상의 세계에서 내가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오늘도 그늘진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어야 하니까.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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