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선창(船艙)'의 가수 고운봉(상)

입력 2013-05-16 14:28:20

청아하고 애수어린 창법, 데뷔곡으로 인기가수 반열

초창기 가수들의 소년 시절 이력을 두루 살펴보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슴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예술적 욕망과 그것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냉혹한 환경 사이의 갈등과 괴리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식민통치하였던 1930년대 당시 부모들은 자신의 귀한 자녀가 판검사나 면서기 되겠다면 적극 도와주었지만 만약 화가나 시인, 혹은 가수가 되겠다고 하면 크게 놀라며 만사를 제쳐 두고 뜯어말리던 분위기였지요.

특히 가수 지망에 대해서는 몹시 흉하게 생각하며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풍각쟁이로 규정하던 관행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런 몰이해와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꿋꿋하게 관철시키며 대중예술의 길을 걸어간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입니다. 고복수와 남인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려는 가수 고운봉(高雲峰'1920∼2001)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였습니다.

1920년 2월 9일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고운봉은 본명이 고명득(高明得)입니다. 대중가요 작사가 고명기의 아우였지요. 1937년, 17세 되던 해에 예산농업학교를 마치고 고명득은 아버지의 돈궤에서 돈을 훔쳐내어 서울로 무작정 달아났던 것입니다. 상경 이유는 오로지 유명한 가수로 성공을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서울로 온 고명득은 당시 자신이 좋아하던 강석연, 채규엽, 이난영, 이은파, 최남용 등 일급가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던 태평레코드를 찾아갔지요. 그 무렵 태평레코드를 지휘하던 분은 극작가이자 작사가로 활동하던 문예부장 박영호 선생이었습니다. 박 선생은 마침 한반도의 북부지역과 만주 일대로 악극단 공연을 떠나기 위해 몹시 바쁜 시간이었지만 작곡가 이재호와 함께 고명득의 노래 실력을 테스트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해내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갖춘지라, 곧바로 고명득을 태평의 전속가수로 채용하고 '운봉'이라는 예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곤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무려 3개월 동안의 악극단 순회공연에 참가하도록 했습니다.

그토록 가수가 되고 싶었던 고명득에게는 실로 꿈같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태평레코드 전속가수의 신분으로 취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지요.

드디어 1939년 여름, 고운봉은 자신의 첫 데뷔곡을 발표하였는데 곡명은 '국경의 부두'(유도순 작사'전기현 작곡, 태평 8640)였습니다. 이 노래를 작사한 유도순 선생은 이미 시인으로 데뷔하여 시집 '혈흔의 묵화'를 발간한 경력을 가졌었지요. 작곡가 전기현 선생의 품격 높은 솜씨도 정평이 높았습니다. 여기에다 고운봉의 잔잔한 애수가 느껴지는 창법으로 압록강 국경 지역의 처연한 분위기를 노래했으니 대중들의 가슴이 설레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압록강, 농암포, 자후창, 신의주, 유초도, 진강산 따위의 지명을 떠올리며 우리의 잃어버린 고향, 눈물에 젖은 국토를 은근히 암시했던 것이지요. 당시 태평레코드 작품의 광고지에는 고운봉을 '순정가수'로 소개했습니다. 그만큼 맑고 청아하며 애수에 젖은 창법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지요.

고운봉은 단번에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연이어 1940년 초반까지 두루 발표한 곡들은 '홍루야곡''남월항로''남강의 추억''달뜨는 고향'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는 '남강의 추억'(무적인 작사'이재호 작곡, 태평 8662)이 빅 히트곡입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오케레코드사에 항상 뒤지기만 했던 태평은 마침내 라이벌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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