鳥葬 행하던 바위 비추는 아침 햇살, 인간의 욕막 꾸짖는 듯…
조장(鳥葬). 시신을 새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장례방식이다. 이 종교에서는 영혼은 영원하지만 육체는 일단 죽으면 불결한 흉물로 변해 신성한 흙이나 물, 불과 접촉할 수 없으므로 화장이나 매장을 하지 않았다. 결국 시신을 높은 곳에 놓아두어 독수리와 같은 새가 먹게 해 육신이 없어지도록 했다. 그렇게 해도 죽은 자이니 말할 수 없고 침묵해야 하는 것이어서 '침묵의 탑'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 같다. 오늘날에도 인도, 티베트, 네팔 등지에서는 풍장이나 조장이 행해진다. 그 장소의 이름들도 '침묵의 탑'이라니 이제 보통명사가 된 셈이다. 페르시아에서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중엽까지 1천여 년 동안 번성했던 조로아스터교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약 15만 명의 신도가 남아있다. 그중 1만5천 명가량이 이란 중부의 역사 도시 야즈드 부근에 살고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지이고 침묵의 탑이 있어 유명한 야즈드를 찾았다. 수도 테헤란에서 남동쪽으로 약 680㎞ 떨어져 있는 곳이라 아침 일찍부터 사막 길을 자동차로 12시간이나 줄기차게 달려 해질 무렵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흙모래 산 두 개가 나란히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장지를 방문했다. 1930년대부터는 이곳에서 조장을 금지했고 조로아스터교 신자도 이슬람 교인과 마찬가지로 매장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침묵의 탑은 해발 50m 정도의 바위산 위에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 올라보면 원형의 공간은 직경 15m쯤 되고 흙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아무런 장식도 없다. 야즈드 시가지와 그 옆으로 펼쳐진 벌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하늘에서 날아온 새들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방법을 취했으므로 지붕이 없다. 남녀별로 각각 나누어져 두 개의 탑이 나란히 서 있다. 시신을 정상까지 운구하는 등 여성들의 장례의식은 여성 종사자들이 시행했으므로 낮은 곳이었고 좀 더 높은 곳은 남성의 장지였다.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에 들어서니 삶의 허무감이 느껴진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시신이 독수리에게 몸을 내놓고 누워 있었을 평평한 바위에 지금은 아침 햇살이 가만히 내려앉아 있다. 화사한 그 빛은 살아있는 동안 인간들이 가졌던 욕망을 비웃는 듯하다. 산 자들에게 종착역인 이곳은 사자들에게 있어서는 외로운 여행길의 출발역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살과 뼈가 성스러운 원소, 물과 불, 흙을 더럽히기 전에 육체의 허물을 벗으려 했던 것이다.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남으로써 편안함을 얻는다는 것, 죽음을 삶의 어두운 끝이 아니라 하나의 동력으로 인식하자는 것이다. 텅 비어 있는 원통형 장례식장은 파란 하늘을 항해 열려 있다. 여기저기 망령들이 떠돌고 있을 것이라는 으스스한 느낌과 함께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침묵의 탑 아래에는 장례가 치러지는 기간 유족들이 철야로 머물며 사자와 이별의 슬픔을 달랬던 시설들이 있다. 지금은 폐허처럼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었던 곳으로 상상된다. 부근에는 새로운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다. 오늘날의 조로아스터 신자들이 이곳에 와서 묻힌다고 한다. 탑을 둘러싼 담장 사이에 만들어진 조그만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왔다. 샛노란 들꽃 한 송이가 웃는다. 침묵을 벗고 살아있는 일상으로 복귀한 느낌이다. 다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삶을 향해 죽음의 공간을 떠난다.
내친김에 조로아스터 유적 중에 신성한 불의 사원 '아테슈카데'를 찾기로 했다. 1천600년 동안 계속 타오르고 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전 세계에서 신도들이 찾는 곳이다. '아테슈카데'란 이름은 불을 모시는 곳이라는 뜻이다. 크지 않은 사원건물 앞에는 둥근 연못이 있다. 건물 정면 상단에는 조로아스터교의 선신 '아후라 마즈다'를 상징하는 날개 펼친 새 모양의 문양이 걸려 있다. 그 아래 세 군데에 페르시아어로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말'이라는 3대 서약이 적혀 있다. 신성한 불은 놋쇠로 만든 그릇에 담아 투명한 유리관으로 덮어 보관하고 있다. 이 종교에서 불은 선신의 상징 중 하나로 불을 통해 신의 본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신도들은 불을 보면서 경전을 읽는 의식과 함께 살아있음에 감사드린다. 불을 지키는 사제들은 청정을 의미하는 흰옷 차림에 성화가 오염되지 않도록 흰 마스크를 쓴다.
유리에서 나오는 빛의 반사를 피하기 위해 한참 동안 카메라를 통해 불꽃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사진촬영을 했다. 그렇게 성스러운 불길을 바라보는 동안 그 자체가 기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소가 어디든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기도하는 행위가 가진 아름다움은 세계 공통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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