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평양의 초코파이

입력 2013-05-04 08:00:00

"록 음악, 비디오, 블루진, 패스트푸드, 뉴스 채널, 텔레비전 위성에는 붉은 군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이 있다." 프랑스의 좌익 철학자로 '혁명 수출의 아이콘' 체 게바라의 동지이기도 했던 레지 드브레가 1986년에 한 말이다. 공산당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1953년 정부의 임금 동결로 촉발된 동독 노동자 시위에 공산당은 '카우보이 바지와 텍사스 셔츠'를 입은 서양 선동가들의 부추김 탓이라고 비난했다. 자유의 상징으로서 청바지의 위력을 시인한 셈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청바지를 '억압'했지만 인민들의 '타락'을 막을 수 없었다. 소련 암시장에서 청바지 한 벌 가격은 노동자 평균 월급과 같은 150~250루블이었으나 없어서 못 팔았다.

록 음악의 위력도 청바지 못지않았다. 1989년 모스크바 평화음악축제에 운집한 26만 명의 관중 위로 울려 퍼진 서독 록그룹 스콜피언스의 '변화의 바람'은 소련 붕괴를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30년 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기 시작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사그라진 뒤 권좌에 복귀한 공산당은 록 음악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정화 사업'으로 모든 록 가수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 소양 시험을 보게 했다. 이에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라는 전위 밴드는 '100포인트'라는 노래로 이렇게 빈정댔다. "그들은 자유를 두려워해/ 그들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해/ 그들은 (유엔)인권헌장을 두려워해/ 그런데 우리가 왜 대체 그들을 두려워하지?"

공산당의 대응은 유치했다. 가수 면허를 취소하거나 징역형이라는 물리적 대응이 고작이었다. 그것으로 록 음악이 뿜어내는 자유와 반항 정신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들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대한 재판은 바츨라프 하벨이 이끄는 반체제 단체의 결성에 영감을 주었다.

영국의 가디언지가 "초코파이가 평양에서 전설적 지위에 올랐다"며 "지구 상의 가장 폐쇄적인 북한이 마시멜로로 채워진 작고 둥근 초코파이에 의해 서서히 변화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이 들지만 초강대국 소련이 청바지와 록 음악에 치명상을 입은 사실을 생각하면 '핵폭탄을 보유한 최빈국' 북한이 초코파이가 몰고 온 변화의 바람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 또한 터무니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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