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접수'수납 업무를 담당하는 이모(24'여'대구 수성구) 씨는 병원이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손님에게 욕설을 듣지 않거나 삿대질을 받아보지 않은 날이 없다. 병원비가 비싸게 나왔다며 고성을 지르는가 하면 무료 주차가 되지 않는다고 이 씨에게 주차권을 던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이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푹 숙인 채 "병원 방침상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이 씨는 "이제는 누가 조금만 큰 소리로 말해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깜짝 놀란다"며 "일을 시작한 후 사람이 싫어졌다"고 털어놨다.
은행원과 승무원 등 서비스업 종사자를 일컫는 일명 '감정노동자'들의 인권이 위협받고 있다.
최근 포스코에너지 한 임원의 '항공기 내 승무원 폭행 사건'과 관련, 사회 여론이 들끓은 가운데 손님을 응대하는 일의 특성상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실이 주목받고 있다.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이 2011년 서비스업 종사자 3천9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민간서비스 노동자 삶의 질 연구'를 위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64%가 최근 3년 동안 고객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또 이들 중 40%가 고객 또는 상사'동료로부터 인격을 무시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으며, 폭언을 들었다는 경험자는 30%, 성희롱 경험자는 9%, 폭행 경험자는 5% 등으로 조사됐다.
감정노동자들은 매번 손님들과 전쟁을 치르지만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회사 방침에 따라 감정노동자들은 늘 '백기'를 들 수밖에 없다.
유명 제과점에서 판매관리직으로 일하던 하모(25'여'대구 서구) 씨는 최근 직장을 그만뒀다. 매장에서 사지 않은 빵을 막무가내로 교환해 달라고 요구한 손님 때문이었다. 영업 방침상 안 된다고 말했지만 손님은 욕설을 퍼부었다.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자 급기야 하 씨의 얼굴을 할퀴기까지 했다. 하 씨는 "회사에서 교육받는 게 '손님에게 좋게 설명하고 죄송하다고 말하라'는 것이 전부"라며 "그날도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구지역 대형마트, 백화점 등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고객들에게 욕설을 듣거나 인격 모독을 당했을 때 종업원이 취할 수 있도록 정해진 행동 매뉴얼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고객 상담실이 설치된 대형마트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PC방과 중'소형 마트, 편의점 등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인격 모독이나 폭행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곽모(21'여'대구 북구 태전동) 씨는 "한밤중에 술에 취해 온 손님이나 청소년들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말들을 들을 때가 많다"며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꾹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감정노동자들의 애환이 심해지자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서비스업 사업주를 대상으로 한 '여성 감정노동자 가이드라인' 마련에 나섰다. 또 직무스트레스 대처법과 직종별 고객 응대 대응 매뉴얼을 담은 '여성감정노동자 인권수첩'을 만들었다.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이성종 정책실장은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사용자'의 폭력만이 문제화돼 있고 고객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폭력, 폭언 등에 대한 대처방안, 예방책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며 "근로기준법의 포괄적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키워드
감정노동=근로자가 본인의 감정과 표현을 통제하면서 고객을 대해야 하는 노동형태로, 주로 고객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서비스 산업에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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