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박범신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 저녁 아버지 선명우가 사라졌다. 셋째 딸 시우의 생일, 퇴근 후 가족파티에 늦지 않으려 서둘러 집으로 향하던 그는 집 앞까지 왔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왔던 길로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파티에 있으나 없으나 존재감이 없던 아버지, 기껏해야 설거지를 하고, 선물 꾸러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면 그만인 아버지, 그러나 그 아버지가 떠나자 집안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집안의 모든 경제권과 결정권을 갖고 있던, 그래서 집안의 주인이자 든든한 보호막인 줄 알았던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는 순식간에 평정을 잃고 허물어졌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 노숙자 시설을 전전하다가 한 달 만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명품과 큰 집, 수천만원짜리 악기를 당연하게 여겨온 세 딸은 빚쟁이에게 시달리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는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충남 강경에 젓갈 사러 갔다가 네 아버지와 닮은 사람을 봤다'는 이모의 말에 막내딸 시우는 아버지를 찾아 서울에서 강경을 오간다. 그 와중에 이 소설의 화자인 '나'를 만나고, 나는 시우의 아버지를 찾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선명우가 어째서 스스로 실종되어버렸는지 알아간다.
작가 박범신의 등단 40년째 40번째 소설 '소금'은 아버지이자 우리 사회 생산체계의 중추 역할을 하던 한 아버지의 가출을 그린 작품이다. 열심히 일하고 충직하게 가족을 부양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짐을 길바닥에 팽개쳐버리고 제 갈 길을 가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벌어오던 돈으로 먹고 자고, 입고, 갖가지 명품을 소비하던 아내와 딸들은 하루아침에 극빈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걸 뻔히 알면서 '엿 먹어라!'며 떠나버린 것이다.
막내딸 시우는 아버지를 찾아다니는 동안 아버지를 알아간다. 아버지의 꿈, 아버지의 첫사랑, 아버지의 삶, 아버지라는 이름 말고 선명우라는 이름의 의미 등등. 그리고 내 아버지 선명우에게 아버지 선기철(시우의 할아버지)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는 그때까지 아버지는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자식들을 보살펴주는 존재로만 알았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안 것도 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부터다. 시우의 할아버지 선기철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뙤약볕 아래 염전에서 일하다가 소금에 얼굴을 박고 죽었다.
작가의 말에서 박범신은 "소설 '소금'은 가족소설 문법에서 비켜나 있다. 화해가 아니라 가족을 버리고 끝내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자본의 폭력적인 구조가 그와 그의 가족 사이에서 근원적인 화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가출을 생각하던 선명우는 병원에서 중년의 안전요원을 만난다. 그는 가출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선명우의 말에 "돈 벌어 보탠 게 없는 새끼들이 나가야지, 왜 애비가 나갑니까?"라고 말한다. 아하! 그럴 수도 있겠다. 선명우는 아내와 아이들이 가출하고 없는 집을 상상한다. 아내에게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고급 드레스와 핸드백을 불태우고, 아침에 쓰고 뚜껑도 닫지 않은 아이들의 화장품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한다. 빈방을 순례하는 것만으로도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소금'은 다소 비현실적인 데가 있다. 무거운 짐을 진 아버지를 위로하다 보니 나머지 가족을 몰상식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경향도 있다. 치밀한 작가 박범신답지 않은 과장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가출을 꿈꾼다' 혹은 '식구들이 모두 가출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은 선명우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남편이 되는 것은 싫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더 싫다고 말했던 소설 속 화자 '나'는 결국 아버지의 길을 가고(연인이 임신했으므로), 핏줄로 엮인 가족을 버렸던 선명우는 길에서 만난 의붓가족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염전으로 나간다. '아버지의 자리'를 버린 남자가 먼 길을 돌아 도착한 곳은 여전히 '아버지의 자리'인 셈이다.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리 몸부림쳐도 선량한 남자는 아버지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의 한살이에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었을까. 367쪽, 1만3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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