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침묵의 가치

입력 2013-04-20 15:57:16

국회의원 재보선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인사청문회니 뭐니 하면서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는 글들을 읽어보면, 두드러지는 키워드가 하나 발견되는데, 바로 '소통'이다. 정치뿐 아니라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이 '소통'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큰 화두인 모양이다. 다들 소통해야 한다고, 소통 못해서 큰일이라고 한다. 성직자로 살다 보면 주로 하는 일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이다. 늘상 하는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잘 하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말을 많이 하고,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고 소통이 더 잘 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소리가 크다고 설득력이 갖춰지는 것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문화적 소양이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에는 합의가 아닌 강압이 의사결정의 기본 수단이었다. 실권자의 한 말씀은 곧 권력의 표지였고, 대중들은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현재진행형인 세상이라면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혀는 몸을 토막내는 칼)의 경구가 눈 앞의 현실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보급률이 90%에 접근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한 말씀 할 수 있고, 장삼이사(張三李四'평범한 사람들)의 한 말씀들이 나라님의 목도 떨어뜨린다. 소통이 세상살이의 키워드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화되었다는 뜻이니까 좋은 일이지만, 한편 말 값이 헐해지다 보니 함부로 말하고 다투어 목청만 높이는 모양새도 드물지 않게 본다.

어떻게 하면 보다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 그러자면 말하는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누구에게 말하는지, 듣는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듣는 이들 가운데서 어떤 반응을 나타낼 지는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말을 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의 뜻을 알고 그들의 감정을 따라 느끼며 함께 겪을 앞날을 곰곰이 따지려다 보면 입을 떼기가 참으로 쉽지 않다. 오히려 입을 닫고 들어야 함을 발견한다. 그것도 건성으로 들을 것이 아니라 끝까지 마음을 기울여 들어야 한다.

소통의 근본은 침묵이 아닐까? 속내를 감추고 눈치만 보는 비겁한 침묵이 아니라 타인이 말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는 침묵, 어린 사람의 말일지라도 배움의 자세를 갖추어 새겨듣는 침묵, 행실이 말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겸손한 침묵 말이다. 뛰어난 말재주를 대하고는 다만 경탄하겠지만, 겸손한 침묵 앞에서는 저절로 삼가게 되고 공경하며 마음을 열게 된다. 진리는 모두의 것이니, 나 한 사람의 생각보다 무한히 크다. 작은 한 모서리에 불과한 제 의견을 남의 목소리 뒤덮으면서 떠들어봤자 소통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 믿지도 않는 거짓 소리로 이웃의 귀를 채운다면, 소통은 고사하고 공해만 늘어갈 뿐이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 tinos560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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