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기생출신 가수 왕수복(상)

입력 2013-04-18 14:51:09

'최초의 민요조 가수' 찬사, '고도의 정한' 판매량 최고 기록

왕수복(王壽福)이란 가수의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일찍이 1930년대 서울에는 평양기생 출신의 가수 한 명이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통통하고 해맑은 얼굴에 다소 커다란 눈망울을 지녔던 그녀의 대표곡은 '고도(孤島)의 정한(情恨)'과 '인생의 봄' 두 곡이었답니다.

칠석날 떠나던 배 소식 없더니

바닷가 저쪽에선 돌아오는 배

뱃사공 노랫소리 가까워 오건만

한번 간 그 옛님은 소식 없구나

어린 맘 머리 풀어 맹세하더니

시악씨 가슴 속에 맺히었건만

잔잔한 파도소리 님의 노래인가

잠들은 바다의 밤 쓸쓸도 하다

'고도의 정한' 전문

가수 왕수복은 1917년 평남 강동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성실이었지요. 그런데 할머니가 수명장수하고 다복하라며 수복으로 고쳐 불렀습니다. 성공한 많은 사람의 유년시절이 불우하듯 왕수복의 집안도 무척이나 가난하고 불우했습니다. 수복이는 11살에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으로 들어갔습니다. 기성(箕城)은 평양의 옛 이름이지요. 그때부터 왕수복의 재주는 날개를 달고 둥실 떠오를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가곡과 가사, 시조 등의 소리지도를 받았고, 거문고를 비롯한 각종 악기를 두루 배웠습니다.

드디어 수복이가 열일곱 살 되던 해, 1933년은 서울로 가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는 벅찬 해였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갈고닦은 서도소리 가락의 느낌이 살아나는 바탕에 유행가 가락을 얹어서 엮어가는 왕수복만의 독창적 창법을 구사했던 것입니다.

1933년 여름 왕수복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울지 말아요'와 '한탄' 등 2곡이 수록된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습니다. 이 음반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락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식민지 백성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안겨주었고, 이런 왕수복에게는 '최초의 민요조 가수''최초의 기생가수' 등의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왕수복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전 조선에 울려 퍼지게 된 것은 1933년 가을, 폴리돌레코드사로 옮긴 뒤 유행소곡이란 이름의 노래 '고도의 정한'(청해 작사'전기현 작곡, 포리도루 19086)과 '인생의 봄'(주대명 작사'용수 작곡, 포리도루 19086)을 발표한 뒤였습니다. 유성기 음반 앞뒷면에 실린 이 노래는 당대 최고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당시 폴리돌레코드회사에서 왕수복이 취입한 음반을 선전하는 광고 문구를 함께 읽어보실까요?

평양의 명화(名花), 왕수복 입사 제1성, 신유행가의 호화, 금수강산 평양이 나흔 포리도루 전속 예술미성의 가희 왕수복 양의 독창 레코드 '고도의 정한'과 '인생의 봄'은 과연 정적한 가을에 우리를 얼마나 위로하여 줄까! 드르라 이 호평의 소리반을! 왕수복 취입집 반도 제1인기 화형(花形)가수!

이때 '화형가수'란 말은 가장 훌륭한 최고의 가수란 뜻입니다. 왕수복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대표적인 여성가수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곡들은 너무도 많아서 일일이 여기에 옮겨 적지 못합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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