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사회를 반영한다. 이 명제는 어떤 형태로든 인정되어야 한다. 영화가 단순한 오락거리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시간을 때우는 '심심풀이 땅콩'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대중들은 그 '심심풀이 땅콩' 같은 영화를 보면서 어느 순간, 영화의 세상에 빠져 주인공과 그가 처한 현실에 호감을 가지다가 공감을 하게 되고 이윽고 동일시를 느낀다. 관객들이 영화에서 동일시를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평소 느끼는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드는 가장 큰 의문. 왜 영화의 주인공은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 뭔가 허점이 있는 인물일까? 가령 왜 '괴물'과 '7번 방의 선물'의 주인공은 정신지체아이고, '왕의 남자'의 주인공은 최하위 계층인 광대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뭔가 모자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들과 쉽게 동일시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삶은 언제나 뭔가 모자라 더 많은 것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영화 속 인물이 욕망하는 것을 함께 욕망하면서 그들의 희로애락을 공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욕망이 나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공정사회'도 뭔가 모자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보험회사에 다니며 열 살 된 딸을 홀로 키우는 아줌마에게 불행한 일이 닥친다. 보험 고객 때문에 딸의 하교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는데, 하필 그날 딸이 성폭행을 당한 채 만신창이가 되어 버려진 것이다. 경찰은 처음부터 성의가 없고, 담당 형사는 절차를 내세우며 정신적 고통만 주고, 별거 중인 유명 치과의사 남편은 자신의 명예 실추 때문에 은폐하려고 한다. 이제 가난하고 나약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과연 그녀가 딸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뭔가 모자란 인물에게 던져진 엄청난 난관을 먼저 보여준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난관. '공정사회'의 이지승 감독은 영리하게도 이 부분에서 사회성이라는 영역으로 영화를 이동시킨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성폭행이라는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것을 경찰도, 형사도, 아버지도 아닌 어머니 홀로 복수한다는 점에서 강한 동일시도 이끌어낸다. 이제부터 영화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치부 가운데 하나와 정면으로 맞서 싸워나간다. 연약한 어머니 역을 맡은 장영남은 고군분투하며 딸의 가해자를 찾아나서고 결국 개인적 복수를 하고 만다. '공정사회'에 그려진 개인적인 복수는 이제까지 본 그 어떤 영화보다 잔혹하지만, 그럼에도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성폭행이나 성 상납이다. 그 때문인지 한국영화에서도 성폭행을 다루는 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작년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돈 크라이 마미'와 '나쁜 피'가 그러했고, 그전에도 '친절한 금자씨' '오로라공주' 등이 그러했다. 이런 영화들의 특징은 피해를 당한 여성이나 그녀의 친인척이 직접 가혹한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대부분의 영화에서 여성이 잔혹한 육체적 복수를 한다. 왜 그럴까? 또는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령 '돈 크라이 마미'의 경우 자신의 딸을 성폭행하고 동영상으로 협박한 10대를 어머니가 직접 찾아가 차례로 타살한다. 딸이 자살한 후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어진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공정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직접 범인을 잡으려 나섰다가 결국 놓치고 만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흥신소 직원을 사서 가해자를 잡은 다음 그녀만의 방법으로 잔혹하게 복수하는 것이다.
여기서 왜 법에 의지하지 않고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하느냐고, 그런 복수는 오히려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 그려진 법과 질서는 피해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입은 상처의 그 무시무시한 깊이를 외면한 채 절차상의 문제만 늘어놓거나,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주기만 한다. 그래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가해자는 오히려 큰소리치고 활보하는데, 피해자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형국. 비록 영화 속 어머니의 복수가 비현실적인, 상상의 그것이라 하더라도 영화에서라도 통쾌한 복수를 하길 원하는 관객들의 욕망이 반영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정사회'는 관객들의 이 욕망을 제대로 재현했다. 사실 '공정사회'는 그리 잘 만든 영화도 아니고, 세련된 영화도 아니다. 제작비 5천만원, 단 9회 차로 촬영한 영화이다. 이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플래시백도 거칠고, 연기도 투박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영화에 담겨 있는 장점을 약화시키지는 못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AZOOMA'이다. 세상에 홀로 남아 악착같이 싸우는 그 이름. 아줌마라는 명사에는 어떤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억척스런 아줌마의 자식들이고, 그런 아줌마 때문에 지금도 살고 있다. '공정사회'는 이 아줌마를 통해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아니, 육체적 폭력을 행한 자에게 같은 폭력을 행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를 살고 있는가? 모르겠으면 영화를 보라. 영화는 사회를 반영한다.
강성률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rosebud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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