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자란 소년은 대도시를 꿈꿨다. 그곳에만 가면 미래가 활짝 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열일곱 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왔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다. 단란한 가정을 이뤘고, 이제 중산층의 반열에 올랐다는 자부심도 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가 '거덜났다'는 뉴스가 들리기 시작했다. 회사는 문을 닫고,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자 단란했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중년에 접어든 소년은 고향집 침대에 홀로 앉아 있다. 30년 전 집을 떠날 때까지 잠을 자며 꿈을 꿨던 그 침대. 모든 것이 30년 전 그대로다. 농장에 일하러 나가시는 어머니가 등이 굽은 노인이 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인터넷에 실린 유럽 재정 위기 이후 그리스 서민의 삶의 모습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우리 모두 겪어봤듯이 나라가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의 늪에 빠져 버리면 중산층과 서민들은 그들의 의지와 책임에 관계없이 혹독하고 참담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것이 나라 살림살이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다. 최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2012 회계연도 국가 결산'을 보면, 국가 부채는 902조 4천억 원이다. 전년도보다 128조 9천억 원이 늘었다. 아직 국가 부채가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증가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는 국가 부채보다 가계 부채가 더 큰 문제로 부상했다. 이달 14일 세계 1위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가 15년 만에 '한국 재창조 보고서'를 내놓았다. 요지는 15년 전의 장밋빛 전망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 중산층의 절반 이상이 적자인 빈곤 중산층이어서 한국 경제가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1천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 부채 가운데 450조 원이 주택담보대출 등으로 인한 중산층의 짐이고, 저소득층의 생계형 부채도 88조 원에 이른다. 박근혜 정부에서 도덕적 해이를 비롯한 각종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민행복기금을 설치하기로 한 것도, 빚더미 속에서 시름하고 있는 서민들을 구제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안정도 경제발전도 이룩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는 어떨까. 우리가 국가 부채와 가계 부채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시민들의 삶의 터전인 도시의 부채' 문제는 등한시해 온 감이 없지 않다. 강원의 알펜시아 리조트, 인천의 세계도시축전 및 송도'영종'청라 신도시 개발, 용인과 김해의 경전철 사업 등 지자체의 과도한 개발 사업이 지방재정을 위기로 몰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지역민들에게는 '남의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2005년 대구시(본청)의 빚이 예산 대비 68%였다는 사실을 아는 시민은 그리 많지 않다. 빚 때문에 난리가 난 인천의 부채비율은 2012년 말 기준 35.1%이다.
대부분의 민선 자치단체장들은 무작정 일을 벌인다. 성공하면 치적이 되고, 실패해도 책임질 일이 없다. 더군다나 전임자가 만들어 놓은 빚의 경우 "내가 어쩌란 말이냐"고 해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강운태 광주시장이 '1일 대구시장'을 맡으면서, 대구가 2007년 이후 빚을 5천억 원 넘게 갚아나간 것을 알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 경영이나, 집안 경영이나, 도시 경영이나 '긴축'은 인기 없는 정책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웬만한 소신 가지곤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김범일 대구시장은 확실히 정치'꾼'은 못 되는 것 같다. 솔직히 빚 좀 덜 줄이고, 여기저기 선심(?) 좀 썼으면 욕을 덜 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대구는 지금 '침체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핵심 전략을 찾아내고, 필요하면 투자를 해야 한다.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정답은 하나의 단위 사업에 있지 않다. 도미노처럼 하나의 투입이 전체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김 시장이 모범 행정가를 넘어 성공한 정치인이 되는 길이다. 정치'꾼'이 판치는 세상에서 '인기 없지만 해야 할 일'을 한 점을 높이 평가해 덕담 한마디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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