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 교육 새 모델 '엘 시스테마'
"오늘은 악보 보지 않고 해보자. 잘할 수 있겠지? 자, 첫 음 한 번 내볼까?"
이달 11일 오후 대구 서구 북비산초등학교(교장 정활란) 강당. 50명의 학생들이 플루트'클라리넷'색소폰'튜바'심벌즈 등 저마다 악기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2011년 창단된 이 학교 윈드오케스트라(관악기와 타악기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다. 지난해 '제37회 대한민국 관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다.
아이들의 표정은 밝았다. 자신감도 넘쳐났다. 음악을 배우는 소감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이 번쩍 손을 든다. 박가람(6년) 양은 "공부할 때 집중력이 늘었다"고 자랑했고, 박현수(5년) 군은 "컴퓨터게임보다 훨씬 재미있다"며 웃었다. 단장을 맡고 있는 김영은(6년) 양은 "열심히 노력해서 음대에 진학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모두 구김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만, 단원 가운데 일부는 월 2만원의 수강료를 면제받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렵다. 학교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음악 과외를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들이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이진화 교사는 "창단연주회에 오신 학부모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며 "갈수록 인기가 높아져 담임교사 추천, 청음(聽音) 테스트 등을 거쳐 단원을 선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오케스트라, 학교를 바꾸다
이 학교의 오케스트라는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학생오케스트라' 사업의 일환으로 구성됐다. 베네수엘라에서 대성공을 거둔 '엘 시스테마'(El Sistema) 프로젝트가 모태다. 일선 학교들이 신청하면 대구시교육청이 선정, 학교당 8천만~1억원을 지원한다. 악기 구입 및 연주실 마련, 강사 확보 등에 필요한 비용을 정부에서 부담하는 형태다.
교육부는 학교 음악 단체활동의 효과가 크다는 판단에 따라 학생 오케스트라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다. 대구시의 경우 2011년 3곳, 2012년 15곳, 올해 상반기 6곳 등 모두 24개 학교로 확대했다. 올해 신청 학교는 17개 교에 이르렀다. 분야도 다양해서 표준 오케스트라에서부터 국악'재즈오케스트라까지 활동하고 있다. 예술교육사업은 오케스트라 이외에 '학생 뮤지컬'(6곳) '예술동아리'(25곳)로 범위가 넓어지는 추세다.
학생오케스트라의 가장 큰 교육적 성과는 사회성 향상 등 학생들의 인성교육 강화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교육부가 학생오케스트라 사업에 참여한 학교들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한 결과에서도 학생 89%가 인성 부문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감 향상' '선생님에 대한 존경' '협동활동 때 친구 의견 존중' 등의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것이다.
대구시교육청 학교생활문화과 나혜랑 장학사는 "중'고교의 경우 학교 적응에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음악 활동에 참여한 이후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며 "예술교육이 인성교육과 학교폭력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달성군 구지면에 있는 달성정보고는 농촌지역 실업계 고교다. 아무래도 학생들의 학습 의욕은 대도시보다는 낮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해 재즈오케스트라를 창단하면서 학교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지각과 결석을 수시로 하던 학생들이 기타'드럼'트럼펫 등에 빠져들면서 수업 태도가 크게 향상됐다. 점심때에 이뤄지는 자율 연습에도 빠지는 경우가 없다.
김희경(50) 교사는 "처음에는 학생들을 이끌고 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단원들이 학교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며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아이들 스스로도 학교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귀띔했다. 테너 색소폰을 연주하는 제갈민(2년) 양은 "내성적이고 조금은 까칠했던 성격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다"며 "하루 3시간씩 하는 연습이 힘들어 중간에 그만둘 생각도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믿고 열심히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민간 차원의 지원도 활발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는 원래 민간 차원의 사회운동이었다. 국내에서도 이 같은 순수성을 표방하는 후원자들이 늘고 있어 기대를 모으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대표적인 곳은 구미지역 청소년들로 구성된 '우리꿈빛 청소년오케스트라'. 지난해 초 구미지역의 뜻있는 인사 10여 명이 기금 4천만원을 모아 창단했으며, 지난 3월 구미문화예술회관에서 '꿈빛 날개를 펼치다'는 주제로 창단연주회를 열었다.
특히 이곳은 일부 인사들의 의기투합 차원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소액 후원제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레인보우 청소년문화센터'의 서한규 변호사는 "지난해 10월부터 소액후원자 100여 명이 월 200만원 정도를 적립하고 있다"며 "항구적인 청소년 지원사업을 위해 앞으로도 대기업이나 정부 예산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음악을 배우면서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그림자가 사라진 것은 관계자들의 큰 보람이다. 서 변호사는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것은 전국적으로도 유일할 것"이라며 "후원 활동이 희망 바이러스가 돼 다른 지역으로도 널리 확산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2009년 창단한 '희망음자리 오케스트라'도 눈에 띄는 곳이다. 교육청의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재능 기부'를 하는 음악계 인사들의 참여가 줄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구지역 5개 초'중학교에 다니는 학생 60여 명에게 악기별 강습과 합주 연습을 지도하고 있다.
최지환(35) 영남필하모니'대구현대음악오케스트라 지휘자 역시 바쁜 시간을 쪼개 올해부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좋은 취지라는 생각에서 부탁을 받자마자 흔쾌히 수락했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해외 연주를 나가는 게 목표"라며 웃었다.
애초 이 사업을 기획했던 교육청 소속 교육복지사들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김수진(32) 복지사는 "다른 곳에 비해 문화적인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지역이란 점에 착안해서 음악 교육 모델을 만들었다"며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라는 데 음악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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