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의 줌인] 지역 희로애락 담은, 대구경북의 '지슬' 기다린다

입력 2013-04-04 07:31:34

'지슬'
'비념'
'지슬'
'비념'

지금 충무로에 조용한 바람이 일고 있다.

영화 '지슬-끝나지 않는 세월2'(이하 '지슬')가 개봉 12일 만인 4월 1일, 6만 관객을 돌파한 것이다. 그것도 5만 돌파 이틀 만에 만들어낸 기록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주도에서만 이미 2만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사실이다.

독립영화는 관객 1만 명만 넘으면 '대박'이라는 이 시대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속도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지슬'에서 한국영화계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지슬의 성공

'지슬'은 제주인들의 상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4'3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아픔을 기존의 극영화 방식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오멸 감독은 미술을 전공한 감독답게 화면 하나하나 마치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인상주의풍의 이미지 중심 영화를 완성했다. 이렇게 만든 영화 속으로 관객들이 스스로 들어와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절대 명제는 역사는 역사가가 해석하는 대상일 뿐이고, 예술가인 감독은 그 역사를 자신의 예술관과 세계관에 맞게 작품으로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작업을 수행한 과정이다. 육지인이 경험하지 못한 제주인의 아픔을 제주 출신의 오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오멸 감독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감독이다. 서울에 거의 올라가지 않고 제주에서 그의 지인들과 함께 작업한다. 다시 말해, '지슬'은 제주인이 제주의 인력과 자본으로 제주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이다. 심지어 영화 내내 제주 방언으로 사건이 전개되어 육지인은 영화 속 자막을 참조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로, 수상하기 전에 오멸 감독조차 그 존재를 몰랐다는, 그러나 인디영화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극영화 경쟁 부문 최고상인 심사위원 대상(Grand Jury Prize)을 받았다.

▷독립영화 '지슬'과 다큐멘터리영화 '비념'

'지슬'은 거의 완전한 의미에서의 독립영화다. 독립영화란 무엇인가? 거대 자본으로부터 독립, 주류 이념으로부터의 독립, 주류 영화 방식으로부터의 독립, 중앙 인력과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 거대 배급으로부터의 독립 등을 목표로 하거나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칭한다. 어떻게 보더라도 '지슬'은 아주 드물게, 온전한 의미에서의 독립영화인데, 특히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중앙 인력과 시스템으로부터의 독립' 부분이다. 철저하게 서울 중심인 이 나라에서 서울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지난한 과정이다. 그런데 '지슬'은 중앙 인력과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하고도 중앙을 비롯한 전국적인 호응을 받아내고 있다.

'비념'. 역시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지만,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이다. 흔히 다큐라는 방식으로 특정 사건을 조명하면, 인터뷰를 하고, 재현을 하고, 풍광을 담아내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극적인 사건의 경우 아픔을 드러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지루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미술가 임흥순은 이런 위험을 피해간다. 그는 기존 다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면서, 과거와 현재를 한 화면에 담아 영화적 콜라주를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만들어낸다. 이 신기한 다큐에는 이전에 맛보지 못한 기묘한 아우라가 있다. 가히 '지슬'만한 울림이 있다는 말이다.

임흥순이 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의 프로듀서인 김민경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4'3사건 피해자의 자손이다. 그녀는 외할머니의 아픔을 카메라로 기록하면서, 그 아픔을 잘 담아내는 방법을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비념'으로 나왔다.

▷제주영화의 성공과 대구경북

두 영화의 공통점은 서울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 영화라는 점과 기존 영화와는 다른 스타일의 영화라는 점이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의 광역단체 가운데 인구도 가장 적고, 면적도 가장 좁은 제주에서 어떻게 새로운 지역 영화의 흐름을 잉태할 수 있었을까? 제주 지역의 대학에는 영화학과도 없고 영화를 전문으로 배운 이들도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육지와 고립되었기 때문에 하고픈 이야기도 많았을 것이고, 그 이야기를 그들만의 언어로 재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를 배우지 않고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제주 영화인들의 의지와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내 고향 대구경북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대구경북 역시 철저한 영화 불모지다. 정식 영화학과도 없고, 영화인을 제대로 육성하거나 지원하는 단체도 많지 않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 거친 땅에서 모질게 자라나 지역의 희로애락을 새로운 스타일 속에 담아 전국에 퍼뜨리는 민들레 같은 영화인이 등장하기를 학수고대한다. 지역의 희로애락을 스스로 표현하지 않으면 남이 표현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데, 진정 그렇게 하고 싶은가?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rosebud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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