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도 강제출국 당할까 신고 못 해요"

입력 2013-04-03 11:04:08

불법체류자들 범죄 피해 당해도 냉가슴만

2006년 스리랑카에서 한국으로 온 L(37) 씨는 지난해 12월 성서산업단지 내 공장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 올 1월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해놓은 터라 들뜬 마음으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L씨는 자신이 직접 생산기술을 가르쳐준 한국인 동료 A(37) 씨와 작업을 하던 중 A씨가 일은 하지 않고 컴퓨터게임에 열중하자 계속 일할 것을 권했다. 그러자 A씨는 L씨에게 욕을 하며 주먹으로 얼굴과 어깨, 옆구리를 때렸다. 이후 1주일 동안 입원한 L씨는 고향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체류만료일인 1월 7일을 넘겼다.

불법체류자 신분이 된 L씨는 병원 치료비 87만원과 방값, 생활비 등이 부담됐지만 경찰에 신고를 해 조사를 받는 것이 더 고민이었다. 부당하게 당한 폭행을 해결하기 전에 본국으로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경찰조사를 받은 L씨는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고 월급도 제대로 다 받기 전에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추방될 것이 걱정된다"며 "억울한 마음은 있지만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것이 꺼려진다"고 말했다.

범죄피해를 당한 불법체류자를 경찰이 출입국사무소에 통보하지 않아도 되는 '통보의무 면제에 관한 지침'이 지난달 1일부터 시행됐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범죄 피해를 경찰에 털어놓기를 꺼리고 있다. 경찰을 믿지 못하는 데다 아직도 통보의무 면제 지침이 시행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 성서산단의 한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던 J(25'여'필리핀) 씨는 지난달 초 한국인 관리자 B(45) 씨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작업 속도가 느리다고 폭언을 하며 휘두른 주먹에 맞아 한쪽 눈이 부어오르는 부상을 입었다. 불법체류 신분으로 경찰에 신고를 하기 꺼리던 J씨는 상담소의 안내서를 받고 나서야 B씨를 고발할 수 있었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신변보호를 요청하며 경찰서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필리핀 친구 4명과 함께 진술을 했다. J씨는 "경찰이 출입국사무소에 알려 추방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경찰서에 가기가 두려웠다"며 "외국인상담소를 찾아 통보의무 면제 지침이 있다는 걸 알고 경찰에 신고를 결심했다"고 했다.

지난해 구미에서 일하며 인근 원룸에서 생활하던 필리핀 여성(26)이 성폭행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여성은 불법체류 신분이었고 성폭행까지 당한 터라 경찰에 곧바로 알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동네에서 비슷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자 이 여성은 용기를 내 경찰에 알렸고 결국 범인은 원룸 주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사건이 해결된 이후 경찰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자신의 신분을 우려해 이 여성은 직장은 물론 집을 옮겨야만 했다.

대구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는 "폭력을 휘두른 업주가 구속되는 등 최근 언론을 통해 지침이 조금씩 홍보되고 있다"며 "무조건 단속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구경북의 인권단체 대표들과 만나서 지침을 알리는 등 기회가 닿는 대로 홍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옥분 대구외국인노동상담소 소장은 "지난달 1일부터 통보면제 지침을 시행하면서 같은 달 18일 미등록 외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며 "단속을 한다고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범죄피해를 안심하고 신고하라는 지침은 제대로 정착될 수 없다"고 했다.

김용철 성서산단노동조합 상담소장은 "경찰차와 비슷하게 생긴 출입국사무소의 차량이 산업단지를 순찰하면서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며 "아직도 외국인들이 경찰에 신고하기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 업주와 종업원에게 지침을 집중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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