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에 병들었지만 보상금은 꿈나무 위해"…김봉순 할머니

입력 2013-04-01 10:10:37

3년 모은 3천만원 쾌척…3년전에도 2천만원, "살아있으면 또 올게"

'원폭피해 김봉순 할머니가 모교인 성서초교를 찾아 장학금을 쾌척한 뒤 자신이 기증한 TV를 보며 손자뻘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몰라요. 몇 년 뒤가 될지 몰라도 또 찾아오겠습니다."

김봉순(87) 할머니는 3년 전 약속을 지켰다. 2010년 모교인 대구 성서초등학교를 처음으로 찾아 책과 냉'온수기를 기증한 지 3년. 미국 정부에서 받은 원폭피해 보상금을 종잣돈으로 3년 전 2천만원을 내놓은 터였다.

3년 만에 다시 찾은 학교는 김 할머니를 열렬히 환영했다. 이번에도 할머니는 3천만원의 거금을 내놨다. 원폭피해 보상금 2천여만원에다 3년간 조금씩 모아뒀던 쌈짓돈을 보탰다. 학교가 할머니를 환영한 것은 액수 때문이 아니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가 고물을 주워 팔아가며 모은 쌈짓돈과 정부지원금을 아껴 모은 돈이 학교에 전달됐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돈을 아끼는 대신 모교 후배들에게는 후했다. 브랜드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색 운동화에 나일론 소재의 윗도리가 할머니의 봄나들이 의상이었다. 액세서리라고는 보세 귀고리가 전부였다. 10년째 쓰고 있다는, 손때 묻은 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김 할머니가 매달 정부에서 받는 돈은 49만8천453원. 노령연금 9만4천600원과 장애수당 3만원을 모두 합한 돈이다. 성서초교 학생 일부도 할머니가 쌈짓돈을 모아 학교에 기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학교 2학년 백승훈 군은 "학교에서 물을 마실 때마다 냉'온수기에 붙어 있는 '(증) 제10회 졸업생 김봉순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가 누군지 매우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보게 돼 기쁘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자신을 알아봐 주고 환호하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혼자 쓰기에도 넉넉지 않은 정부지원금이지만 그녀가 학교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목돈이 쌓일 때마다 학교를 찾는 까닭이다.

사실 김 할머니는 이 학교에 입학은 했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40년 14세의 나이에 학교에 들어간 뒤 17세에 결혼했기 때문이다. 1940년대는 일제의 일본군 강제위안부 징집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김 할머니는 이후 남편과 함께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갔다가 1945년 8월 원폭 피해를 입었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김 할머니는 아이를 낳았지만, 이틀 만에 아이는 숨을 거뒀다. 아이 둘을 더 낳았지만 모두 두 돌을 넘기지 못했다. 원폭 후유증이었다.

"공부를 못한 게 한이 됐고 슬하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평생의 한이었어요. 아이들에게 돈을 내놓는 것은 아깝지 않아요."

이런 할머니의 사정을 알게 된 성서초교는 2010년 할머니에게 명예졸업장을 전달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당시에 했던 약속은 "또 돈이 모이면 다시 학교를 찾겠다"는 것이었다. 김 할머니는 3년 전 약속을 지키고 또 약속했다.

"띄엄띄엄이긴 해도 원폭피해 보상금이 또 나올 거라네요. 내가 또 아껴서 돈을 모으면 목돈이 생기겠죠. 살아있는 동안 또 올게요."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