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춘일단상

입력 2013-04-01 09:10:53

찌는 듯한 폭염이 열사의 여름을 실감나게 하더니 잠시 가을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 이내 다가온다. 시베리아의 한랭전선은 한반도 상공에서 비켜가지 않고 겨우내 버틴다. 이러다가 봄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땅 밑의 모든 씨앗도 얼어 죽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계절의 기운은 어김없이 땅 속에 온기를 불어넣고, 대지를 녹이더니 새순을 땅위로 밀어올리고 있다. 민들레, 쑥, 달래, 냉이가 돋는다. 개나리가 피고, 남도에서는 동백꽃과 산수유가 핀다. 매화. 목련, 도화, 행화, 벗꽃도 순서대로 만개하고 있다.

땅 위의 나무가지도 푸른색이 짙어지고, 이름 모를 새들은 봄기운에 취해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 다닌다. 휴일 오후 육신의 때를 밀기 위해 목욕탕으로 갔다. 고물 적치장에 겨우내 멈추었던 크레인이 고철 덩어리를 찍어 옮긴다. 식당 옆 쥐똥나무 울타리에서도 봄기운이 푸르게 돋고 있다.

이제 바람이 제법 훈훈하다. 식당가를 지나가니 창문에 걸린 무수한 동물의 부위들이 인간인 것을 초라하게 한다. 막창, 대창, 수육, 삼겹살, 갈매기살, 안심, 등심, 닭똥집에 도리탕 모두가 인간에 의하여 짓밟혀지는 먹거리들이다. 육신의 때를 밀었으니 마음의 때만 밀면 무소유가 될까? 육신이야 죽어 태워지고, 어느 수목 아래 버려져 흙으로 돌아가면 끝이지만, 삶이란 살아가야하는 과정이기에 마음의 욕심조차 버리고 살 수는 없지 않을까?

길을 걷는다. 봄기운이 몸 속으로 자꾸자꾸 스며들고 있다. 좀 더 걸으니 폐건물 벽면에 지난 대선 때 떼다 남긴 선거벽보에서 숱한 모함과 협잡, 비방의 언어들이 뛰쳐나와 봄기운을 망치고 있다. 선거 공약들이 어르렁거리며 분노의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

또 길을 걷는다. 어느 초등학교 게시판에 학생회장 선거 벽보가 나란히 붙어있다. 과반수를 얻으면 당선이 되고, 패자는 승자에게 진정으로 승복할 것이다. 초등학교 회장 선거보다도 못한 우리의 정치판, 몸싸움을 방지하기 위하여, 5분의 3을 얻어야 국회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다수결 원칙이 무시되는 사회가 아쉽다. 조금만 양보하고 버리면 서로가 도움이 되는데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는 날까지 욕심을 부리다가, 허망하게 이승을 떠나가는가 보다. 봄은 씻고 버리라한다. 낡고 더러운 것들을 뒤주에서 꺼내, 개울물에 씻고, 꽃바람 훈풍에 욕심을 버리라 한다. 계절에 부끄럽지 않게 버리라한다.

최규목<시인·gm3419@dae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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