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 약속을 가는 차 안, 라디오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17장의 정규앨범을 낸 가수인 그녀에게 사회자가 대표곡을 묻자 그녀는 히트곡이 별로 없노라고 말하며 오히려 어쩌면 그것이 잊히지 않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인순이가 그런 사람이다. 인순이는 최근 『딸에게, 희망엄마 인순이가 딸에게 쓰는 편지』라는 책을 출간했다. 1957년 경기도 포천에서 주한미군인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다문화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견디기 힘든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성장해야만 했다. 가난 때문에 결국 중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녀에게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는 고백을 할 만큼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의 부양을 위해 노래를 하게 된다. 1978년, 댄스풍의 노래를 주로 부르는 3인조 여성그룹 '희자매'로 데뷔한 그녀는 파워풀한 가창력을 인정받기에 이르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의 특별한 외모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룹이 해체되고 그녀는 솔로로 데뷔해 1983년 '밤이면 밤마다'를 히트시켰지만 다문화에 대한 편견의 벽을 넘기에는 여전히 우리 사회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 10년간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다. 결혼을 하고 1996년 외동딸을 출산하면서 그녀는 다시 화려하게 재기를 한다.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그녀의 진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아니 세상이 그녀를 바로 보게 된 것이다.
"잘못이란 것을 알았지만 딸아이를 낳을 때, 사실 미국으로 가서 원정 출산을 했어요." 그녀의 쉽지 않은 고백이 라디오에서 흘러 나왔다. 어쩌면 그 고백은 우리 사회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다문화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내포하고 있다. 어린 시절, 미군 병사에게 딸을 시집보낸 할머니의 친구가 있었다. 그 할머니는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미제 과자를 가져다주었고 할머니에게는 귀한 커피를 갖다 주곤 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친구가 가자마자 "딸자식을 양공주로 팔아먹고 자랑이라도 하는 거냐"며 싫은 소리를 하곤 하셨다. 양공주라는 말은 그 시대에 가장 험한 욕설 중의 하나였다.
인순이는 그러한 질시의 눈초리가 자신의 딸에게 가해지는 것이 두려웠노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녀가 받았을 무시와 차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공연 약속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녀의 말에는 사회적 공인의 가치를 지키려는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가수 이적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노래 "거위의 꿈"은 그녀의 지나온 삶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리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라는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나를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거위의 꿈)
라디오에서 그녀의 인터뷰를 들은 며칠 뒤, TV의 아침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다시 보았다. 사회자와 다른 출연자들은 어떻게 그녀의 딸이 미국의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는지를 주요 화제로 삼았다. 그것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가 거위들의 날고 싶은 꿈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마음이 앞섰다. 이제 계절의 끝을 지키고 선 날 선 바람마저 언 땅을 뚫고 일어선 연한 꽃그늘 아래로 숨어들고 있다. 찬란한 이 봄, 그녀의 이야기가 특별히 성공한 다문화가정의 신화가 아니라 인간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 사회의 성숙한 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해서 그녀의 노래가 부디 오랜 시간 우리의 귓가에 남아 여운으로 남기를….
미래TNC대표사원 62guev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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